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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왜 촛불폭력 진압에만 격앙하나?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강행으로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촛불문화제는 정부의 장관고시로 인해 분개한 시민들이 도로로 나서면서, 불법을 명분으로 한 경찰의 무력진압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살수차의 직수가 위법적으로 이루어졌고, 쓰러진 여대생의 머리를 군홧발로 걷어차는 경찰의 폭력이 국민들을 경악하게 했다. 80년대 군부 독재식 진압이라고 비난이 끓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천주교 사제단의 촛불미사는 촛불시위를 평화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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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


이러한 일련의 촛불문화제 과정을 바라보면서 한편으로 마음속에 무겁게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이제 조심스럽게 꺼내고 싶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으로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을 한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이기심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받아들이기 싫은 이 말들이 유독 지금에 다시 떠오르데는 이유가 있다.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 비단 이번 촛불시위에만 벌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사안에서만 시민들의 비난 여론이 강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 


근래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2005년 쌀만은 지켜야 한다던 농민들의 투쟁에 대해서도 경찰의 무차별 폭력은 이루어졌고, 평택 미군기지 반대에서도, 한미FTA에 반대하는 투쟁에 대해서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생존권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서도 어김없이 폭력진압은 이루어졌다. 그 강도를 표현하자면 오히려 촛불에서 가해진 폭력에 비견할 바가 되지를 못한다.


2005년 농민투쟁에서 전용철 농민이 경찰의 폭력으로 사망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2006년 포항건설노조의 포스코 점거가 이루어지고 있던 7월 16일, 하중근 노동자가 경찰의 폭력으로 사망한 사실을 아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최종적으로 경찰의 폭력이 사망원인이라고 입증되지는 않았다. 다만 현장을 취재했던 기억으로, 의사의 부검으로, 그리고 현장증언을 통해 그렇게 추정하고 주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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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포항 포스코 건설노조 투쟁


당시 포항건설노조의 생존권 투쟁이 하중근 노동자의 죽음으로 인해 무장한 상태에서 공권력과 격렬한 충돌을 벌이기도 했지만, 언론은 폭력성만 부각시키거나 포스코의 경제적 손실을 중점 보도했다. 심지어 모 방송사는 하중근이 폭력적 진압을 당해 중태에 빠지는 과정마저 왜곡해 보도했다.


진압관련 규정을 어기고 경고방송조차 하지 않은 진압경찰이 두 차례나 집회장소를 갑작스럽게 진압해 들어왔고, 두 번째의 강제진압에서 노동자들이 일방적으로 밀리는 사이 하중근은 쓰러졌다.


당시 나는 이 상황을 침탈이라고 표현했다. 법 절차를 어긴 공권력은 공권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언론은 크게 보도하지 않았다. 심지어 모 방송은 포스코로의 행진을 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졌다고 왜곡 보도를 하기도 했다. 또, 국민들도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시각이 많았다. 


촛불집회에 대한 공권력의 강경한 진압을 두고 나타난 시민들의 격앙된 반응을 보면서 농민들과 노동자들이 떠오른 까닭은, 그들이 역시 자신의 주장을 하면서 경찰의 무리한 폭력진압에 의해 쓰러질 때 국민들은 오늘 촛불의 폭력만큼 왜 격앙하지 못했나 하는 의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자신의 입장에서만 사물을 바라 볼 수밖에 없는 원초적 한계를 지닌 지성인가 하는 패배감이 들기도 한다.

   

창원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발언대에 나온 한 농민이 있었다. 그는 쌀 개방 반대투쟁과 한미FTA 투쟁에서 전면에 나서 활동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로인해 개인적으로 많은 희생을 당해야 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평소 재미있는 말주변으로 분위기를 풀어나가는 그의 표정이 그날따라 어두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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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농민투쟁


아마도 그는 촛불집회를 보면서 농민들의 쌀투쟁에 대한 아련한 회상을 접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농민들이 생계를 제쳐놓고 쌀 개방 반대를 외칠 때 시민들이 이렇게 나서주었다면 쌀 개방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회의감 말이다. 나는 지금 촛불문화제를 바라보는 농민들의 감춰진 시각이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국가기반 산업인 쌀을 지키자는 요구나 국민건강권과 검역주권 수호를 위한 촛불시위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도 촛불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공통적으로 생존을 위한 투쟁이며 권리에 대한 투쟁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사회적 이슈가 특정계층인가 대중적인가 하는 것일 뿐이다.


현장에서 나타난 ‘폭력경찰 물러나라’하는 구호와 ‘경찰청장 퇴진’ ‘대통령 퇴진’도 너무나 닮아있다. ‘빨갱이’ ‘폭도’로 매도되는 상황도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경찰의 폭력에 격앙하는 시민들의 정도나 언론의 태도가 너무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유 있는 주장에 대한 조직화된 계층의 시위와 자발적 시위의 차이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분명한 것은 대중 스스로가 소수나 약자의 시위의 동기에 대해 이중적 잣대로 검열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한 평론가는 이를 두고 사회적 연대의식의 부족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못내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가 없다. 농민들의 피 끓는 절규를, 노동자들의 한 맺힌 절규를 현장에서 들어야 했던 내가 촛불을 보면서 기대하는 것은 시민의식의 성장이다. 내가 아닌 타인의 주장에 대해서, 그리고 소수자의 주장에 대해서도 일방적 매도나 외면보다는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시민의식의 성장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