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은 학원통제정책과 함께 소위 ‘문제학생’으로 지목된 학생들을 휴학시키거나 군에 강제징집한 것으로 밝혀졌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 반대 시위를 비롯한 대학가의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광범위한 대학 내 사찰은 물론, 분담지도교수제와 교수재임용제 시행, 학도호국단제도 부활 등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동원해 학원통제 정책을 벌인 사실을 규명했다고 30일 밝혔다. 

진실화해위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2월 유신헌법을 공포한 이후, 긴급조치권을 발동해 유신헌법의 개정을 주장하거나 정부를 비판하는 일체의 활동을 규제하고, 처벌에 나섰다. 

진실화해위는 계엄령, 긴급조치, 위수령, 휴교령 등 잇단 강압적인 공권력의 행사에도 불구하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유신 운동이 거세어지자, 박정희 정권은 학원가를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위험집단’으로 규정하고 범정부적인 차원에서의 통제정책을 시행했다고 밝혔다. 또, 이로 인해 학생과 교수들의 인권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학습권과 신체의 자유 등이 침해됐으며, 헌법상 보장된 대학의 자치와 자율이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규명했다. 
 
진실화해위 조사결과, 사찰은 중앙정보부 학원과 및 관할 경찰서 정보과 직원 등 사찰요원들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대학행정기구의 도움을 받아 학내에 상주하면서 학생 및 교수의 동향, 학생회 활동, 시위 정보 등을 파악해 상부에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사찰요원들은 학생들을 포섭해 프락치 행위를 강요하는가 하면, 심지어 사찰 대상 인물인 학생과 교수의 가족에 대한 이력까지 조사해 이를 사찰에 활용했다. 

당시 서울대생 A씨는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중앙정보부 직원이 돈을 주면서 학생운동에 대한 정보를 묻기에 돈을 던져버리고 나온 적이 있다”고 밝히고, “또 중정직원이 집을 찾아와 아들이 학생운동을 못하게 해라. 연탄을 사주겠다며 어머니를 회유했다”고 진술했다. 

또, 당시 정부는 교수들에게 학생의 학업 이외에 개인신상까지 지도하고 이를 매학기 보고하도록 하는 '분담지도제'를 실시했으며, 지도실적에 따라 분담지도비를 차등 지급하는 등 교수들을 학원통제에도 이용했다. 

이는 1971년 10월 발표된 대통령의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 9개항’에 따라 시행됐다. 당시 정부는 교수들에게 문제학생에 대한 가정방문을 당부하는 등 학생에 대한 철저한 지도를 지시하는가 하면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표면상 교수들의 연구풍토 조성을 목적으로 도입된 ‘교수재임용제’ 역시, 실제로는 이른바 문제교수’를 대학에서 축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재임용 심사기준에 학생지도 능력 등이 포함돼 있어 교수와 학생에 대한 또 다른 학원통제 장치로 기능을 했다는 것이 진실화해위의 판단이다. 

진실화해위는 1976년 2월 최초로 실시된 재임용과정에서 국․공립, 사립 포함한 300여 명의 교수가 탈락됐으며, 공식적인 탈락 이유는 학문적 업적 및 연구실적 미흡이었으나 실제 ‘문제교수’를 비롯해 그간 처우개선을 요구했던 교수, 학교나 총장과 개인적으로 감정이 좋지 않았던 교수들이 주로 탈락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반공교육과 안보교육 정책을 강화한다는 명목 하에 1975년 6월 부활된 ‘학도호국단 제도’ 또한 학원을 병영화하고 학생자치 활동을 금지하는 등 학생들을 병영식으로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1975년 긴급조치 9호 시행 이후 학생회는 해체되었고, 학생들의 일상적인 생활공간인 학과는 학도호국단의 중대로 편성됐다. 모든 과외활동은 학도호국단 안에서 학교당국의 승인 하에 진행됐으며, 학생들의 자치적 활동은 감독·감시의 대상이 됐다. 

이와 함께 정부는 대학에 대한 관리·감독권을 내세워 학사행정에 개입하거나 학생의 제명을 지시하는 등 지나치게 간섭․통제하였고, 각 대학은 지시에 불응할 경우 재정적인 지원 등 불이익을 우려하여 이에 순응한 것으로 드러났다.

1971년 문교부는 ‘학사담당관실’을 설치, 각 대학에 대한 학사지도를 실시하는 한편, 학사담당관실은 대학의 교수재임용, 교수추천제, 학사경고제, 지도교수제 운영 및 문제학생 지도실태 감독뿐 아니라, 학원사태 주동자의 처리 등에 대한 지시·감독, 축제 등 학내행사에 대한 규제업무까지 담당했다.

1979년 서울대 등에서 실시된 ‘강제지도휴학’은 학교장이 학생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학생을 휴학시킬 수 있는 징계조치. 대학당국은 이를 이용해 학칙위반이 아닌 시위전력이나 성향 등 그간의 사찰결과에 따라 대상자를 선정해 강제로 휴학시키기도 했다.  

병무당국은 강제 휴학생 중 징집대상자는 곧바로 군대에 강제 입영을 시켰다. 또, 6개월 이상 수형자의 경우 징집면제 대상자임에도 불구하고, 긴급조치를 위반한 수형학생들을 학교와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군에 강제로 징집했다. 

모 대학 재학 중 지도휴학을 받았던 B씨는 “시위 등 과거의 전력만으로 대상자로 분류, 강제휴학을 명한 것은 구시대의 사상범 예비검속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에 대해 유신시대 자행되었던 학원탄압에 대하여 신청인 및 관련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앞으로 정치적 목적으로 학원에 대해 부당하게 간섭하는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할 것을 권고했다. 

또 대학당국에 대해 정부의 학원통제 정책에 편승하여 학생들의 자율적인 학내활동을 앞장서 통제하고 학생들에 대한 권력기관의 인권침해 행위를 방치 내지 방조한 부분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고, 피해학생들을 포함한 관계자들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노력할 것을 권고했다. 

아울러 지난 유신정권의 학원탄압에 책임이 있는 정부기관과 학교당국은 학생과 교직원들이 입은 전반적인 피해실태를 파악하고, 피해자들의 피해회복과 명예회복을 위한 심층적인 조사를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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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유신정권의 긴급조치는 국민기본권 훼손한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진실규명 결과를 발표하고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전면적인 구제방안 마련하라고 국가에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1일 보도자료를 통해 긴급조치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은 ‘우리의 교육지표사건’과 ‘추영현 반공법․긴급조치 위반사건’에서 수사기관에 의한 인권침해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또, 1974년에서 1979년에 이르기까지 총 9차에 걸쳐 발동된 ‘긴급조치’가 정치․사회․문화 등 사회 전 분야를 위압적으로 통제하면서 헌법상 보장되는 국민의 기본권 전반을 심각하게 침해한 사실도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결정문을 통해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해 1972년11월 제정된 유신헌법은 제53조에서 국가적 비상조치의 일환인 긴급조치권을 아무런 사전적․사후적 통제 없이 대통령 개인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행사할 수 있도록 하여 국민의 기본권에 중대한 침해를 초래했다”고 밝혔다. 

또한, “유신헌법은 긴급조치를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명시하여 긴급조치에 대한 일체의 민주적․법률적 통제도 차단했으며 이러한 유신헌법에 의거하여 실제 1974년, 1975년 9차례나 발동된 긴급조치는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신체의 자유, 학문․예술의 자유, 양심․사상의 자유 및 죄형법정주의, 영장주의, 인신구속기간의 제한 등 헌법상 보장된 가장 기본적인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제약하거나 박탈하는 것이었다”고 결정했다. 

특히 “정권안보 및 유지를 명분으로 내세워 이 조치에 대해 비판하는 경우까지 처벌하게 한 것은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목적으로 하는 현대 입헌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위법․부당한 공권력 행사로서 중대한 인권침해임을 확인했다”고 진실화해위원회는 덧붙였다. 

실제로 진실화해위원회가 입수한 긴급조치 사건 판결문 1,412건 중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항의하는 지식인, 종교인, 학생, 정치인 등 민주화운동 관련자에 대한 처벌 비율이 32%이고, 일반 국민들의 일상적 발언을 유언비어 유포라는 명목으로 처벌한 사례는 48%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입수한 판결문에 한해 정리된 것으로 실제 수사를 받았으나 기소되지 않아 법원 판결에 이르지 않은 예비검속차원의 탄압사례는 수천 건에 이를 것으로 진실화해위원회는 판단하고 있다. 

판결문 자료에 따르면 박정희 정권이 학생들의 반유신운동을 북한과 연결된 국가전복 활동 등으로 몰아 ‘민청학련 사건’을 만들어 발동한 ‘긴급조치 4호’에는 학생들의 출석 및 수업불참과 표현물 소지 등에 대해서도 최하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긴급조치 4호 발동으로 인해 1,024명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이 중 253명이 비상군법회의에 송치된 것으로도 나타났다. 이 가운데 최근 법원 재심에서 무죄 판결된 인혁당계 8명이 사형을 받았고, 이철 등 민청학련 주모자급이 무기징역을, 나머지는 5년 이상의 징역형 등을 처벌 받았다. 

긴급조치로 인해 일반시민들도 피해를 받았다. 당시 “정부가 돼먹지 않아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라고 비판한 한 외판원과 “긴급조치 4호가 정부의 잘못을 은폐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학생들을 억압하려는 것”이라는 말한 한 조류사육업자는 각각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진실화해위원는 “1978년 ‘우리의 교육지표사건’에 대해 당시 중앙정보부법에 열거된 중앙정보부의 수사범위를 벗어나 중앙정보부법을 위반한 것으로서 불법적 수사에 해당되어 위법․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임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또한, 1974년 ‘추영현 반공법․긴급조치 위반사건’은 “서울 남부경찰서가 공작원을 이용해 범죄사실을 유도하는 등 추영현에 대한 1년여의 장기 함정수사 공작을 수행하고, 수사과정에서 범죄사실의 자백을 강요하며 폭행 등 가혹행위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국가에 대해서 “‘긴급조치 위반죄 등으로 판결을 받은 신청인 등 피해자와 그 가족의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라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이어 “대통령의 긴급조치의 발동과 수사과정에 따른 기소 및 재판 등에 대하여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긴급조치로 인해 중대한 인권침해가 자행되었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권고했다.

아울러, 국회에 대해서는 “국회는 긴급조치 위반 피해자들의 피해 및 명예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또한 지난날 유신통치로 초래되었던 인권침해 과거사를 정리하기 위한 별도의 입법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고 권고했다.

법원에 대해서도 “법원은 긴급조치 피해자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헌법재판소에 긴급조치의 위헌여부에 대한 판단을 구하여 긴급조치에 의한 인권침해를 전면적으로 구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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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발굴에서는 54구의 유골이 나왔다. 희생자들의 연령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의 남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해기(80세.진주 하봉면) 할머니는 현장에 도착하자 말자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진주지역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로 추정되는 민간인의 유골이 60여년만에 참혹한 모습으로 세상밖으로 나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30일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가늘골에서 발굴중인 민간인 피학살자들의 유골발굴 현장을 공개했다. 이번 발굴에서는 54구의 유골이 나왔다. 희생자들의 연령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의 남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성고개 3곳에는 150여명이 집단 학살된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진주 주변 각지에 집단으로 학살되어 매장된 민간인들은 대체로 1950년 7월 당시 진주형무소 재소자이거나 한국전쟁직후 예비검속되어 진주형무소에 일시적으로 수감되었던 국민보도연맹원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발굴현장 중간보고회에는 전국유족회와 진주유족회, 마산유족회 소속 유족회, 진실화해위원회 김동춘 상임위원등 관계자가 참석했다.

희생자들은 두 사람이 팔을 서로 교차되도록 손목을 묶인 채 순차적으로 사살됐다.

희생자들은 학살현장 위에서 부터 사살한 후 다시 그 시신 사이로 희생자들을 엎드리게 한 후 사살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가해자는 군인, 희생자들은 국민보도연맹원으로 추정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경남대학교 이상길 교수(사학과)는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1950년 7월 말 희생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목격한 주민들은 3대의 차량으로 끌려와 진성고개와 까치골, 웃법륜골 3개소에서 학살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발굴된 의류품으로 볼 때 이곳에서 학살된 민간인들은 진주형무소제소자가 아니라 국민보도연맹원들로 보인다”며 “가해자는 M1을 소유했던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전쟁 발발당시 M1 소총은 제한된 소수의 군인, 또는 관련자가 소지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국군에 의한 학살이라는 소리다.
 

1950년 당시 이곳으로 끌려와 학살된 희생자들은 발굴현장 윗 열부터 순차적으로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이 교수의 현장설명에 따르면 희생자들은 두 사람이 팔을 서로 교차되도록 손목을 묶인 채 순차적으로 사살됐다. 맨 윗줄에 8명이 2명씩 그 아래 열로 7명 등 아래 방향으로 같은 형태로 질서 있게 쓰러져 있다. 이 교수는 가해자가 희생자들을 학살현장 위로에서 부터 사살한 후 다시 그 시신 사이로 희생자들을 엎드리게 한 후 사살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발굴된 유품으로는 11점의 허리띠와 버클, 38짝의 구두와 작업화, 지퍼, 칫솔, 빗 등이 나왔다. 또, 당시 물약으로 보이는 적은 병도 함께 나왔다. 발굴현장에는 M1소충과 권총의 탄피가 나온 것으로 보아 군인에게 학살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경남대 이상길 교수가 유골발굴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발굴현장에서는 M1탄피등 유류품이 다수 나왔다.

 

진성고개의 민간인 학살사건의 전말 

주민들의 증언과 발굴현장을 종합하여 알려진 진성고개 민간인 학살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 하순(25일 추정) 진주형무소를 출발한 3대의 차량에는 각각 50여명의 민간인과 다수의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민간인이었고 그 중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도 썩혀 있었다. 
 

문산읍을 통과해 현재 한국국제대학을 막 지난 까치골 입구에 1대의 차가 멈추었다. 군인들은 사람들을 끌고 산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고개를 향해 올라가던 2대의 차량 가운데 1대가 현재 발굴하고 있는 가늘골에 서고, 나머지 1대는 200여 미터를 올라가서 웃법륜골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모두 2명씩 짝을 지어 손이 뒤로 묶인 상태였고, 그들의 손목을 묶은 끈은 죄수복을 찢은 천이었다.
 

몇 몇 학살지와 같이 가늘골에서도 구덩이 내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 50여명의 민간인들은 2명씩 뒤로 묶인 상태에서 산으로 올라가 매장지 근처에서 줄지어 서서 죽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맨 먼저 8명이 구덩이의 가장 높은 곳에서 엎드렸고, 뒤에 서 있던 군인들은 총을 쏘았다. 그리고 다음 7명이 먼저 죽은 사람들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두고 엎으렸고 다시 총성이 울렸다. 이러한 과정은 9번이 반복됐다. 학살이 끝난 후 억지로 끌려 온 마을 주민들은 소나무 가지를 덮고 좌우의 흙을 파서 시신위를 간단하게 덮는 것으로 모든 것은 마무리됐다.
 

당시 까치골과 가늘골은 문산에서 온 주민들이 시신을 매장하는데 동원됐고, 웃법륜골은 진성에서 온 주민들이 시신을 매장하는데 동원됐다. 희생자들을 싣고 온 차가 마을 주민들을 태우고 왔고, 주민을 동원하는 과정에는 현지 경찰도 참여했다.

유족들이 학살현장에서 발굴된 유골들을 바라보고 있다.

발굴현장 설명회에는 진실화회위원회와 전국유족회,진주유족회,마산유족회 등 회원들이 참석했다.

 

유족들의 통곡 

이해기(80세.진주 하봉면) 할머니는 현장에 도착하자 말자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그는 결혼 3년 만에 국민보도연맹으로 남편을 잃었다. 당시 남편의 나이는 21세. 1950년 음력으로 6월1일 남편은 친척집으로 상망제( 3년 상에서 보름 만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군 입대 1주일을 남겨놓고 있던 남편은 경찰서에 잡혀있다는 이유로 입대를 하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부친을 잃은 성증수 할머니는 이곳을 지날 때 마다 머리를 조아리고 다닌다고 했다. 혹시나 선친이 유골이 여기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오늘도 그는 ‘개승만’을 연신 외치면 당시 정권에 대한 극도의 증오감을 나타냈다.
 

김동춘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은 “유족과 위원회가 머리를 맞대로 학살현장을 통해 아픈 역사를 알려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억울한 분들을 기억하고 알려내는 사업을 계속해야 한다며 청와대에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특별법 제정과 조사 발굴 사업이 계속 이루어지도록 요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편, 가늘골의 매장지는 과수원 소유자인 이봉춘 할머니의 제보로 알려졌다. 이 할머니는 1980년대 초반 산을 매입하면서 당시 산주로부터 이곳이 학살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금까지 원상을 유지하면서 관리해 오고 있었다. 

유해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경남대학교 박물관은 가늘골에서의 발굴이 끝난 후 나머지 2개소에 대해서도 발굴 작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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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한국전쟁당시 부산·경남지역의 형무소 재소자와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에 대해 국가기관이 피해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부산·경남지역의 민간인학살에 대해 국가가 조사를 통해 실태를 공식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위원장 안병욱)은 2일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부산․마산․진주형무소 등에 수감된 재소자와 민간인이 육군본부 정보국 CIC(특무대), 헌병대, 지역경찰, 형무관(교도관)에 의해 불법적으로 희생됐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가 밝힌 희생자는 최소 3,400여 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576명이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부산․경남지역 형무소에서 희생된 대다수의 재소자들은 정당한 법적절차 없이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희생자들은 예비검속된 국민보도연맹원들과 함께 다른 형무소로 이감시
킨다는 이유로 끌려가 산골짜기나 바다에서 수천명이 집단학살 됐다.  

부산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26일부터 9월 25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부산지구 CIC(특무대)와 헌병대, 지역 경찰, 형무관들이 부산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예비검속자 등 최소 1,500여 명을 집단 살해했다. 그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48명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형무소 희생자들은 다른 형무소로의 이감 등을 이유로 끌려간 후, 부산 사하구 동매산과 해운대구 장산골짜기 등지에서 집단 사살됐다. 그 중 일부는 부산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수장된 것으로도 밝혀졌다. 
 

마산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5일부터 9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마산지구 CIC와 헌병대, 지역 경찰 마산형무소 형무관들에 의해 최소한 717명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총살되거나 마산 구산면 앞바다에 대부분 집단 수장되었다. 이들 중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358명이다. 
 

또, 진주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최소 1,200여 명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진주지구 CIC와 헌병대 그리고 진주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집단 살해되었으며,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70명이다. 진주형무소의 희생자들은 진주 명석면 우수리 갓골과 콩밭골, 관지리 화령골과 닭족골, 용산리 용산치,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마산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1950년 9월 1일,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이 희생 현장으로 끌려가기 직전 트럭에 실려 있는 모습 [출처] Picture Post-5086-pub.1950 (by Bert Hardy)


진실화해위는 이번 사건에 대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비점령지역으로 치안이 유지된 부산과 경남지역에서 특별히 위험하다고 할 수 없는 형무소 재소자와 민간인 수천 명을 군경이 일방적이고 임의적으로 집단학살한 것”이라고 말하고 이는 “사상 유례가 없는 비인도적인 행위”라고 말했다.  

또,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나, 대한민국이 통치하고 있던 비전투․비교전지역인 부산․경남지역에서 단순히 남하하는 인민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하여 형무소 재소자들과 민간인이었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불법적으로 살해한 것은 범죄행위”라고 말했다. 
 

진실화해위는 “재소자 가운데 일부의 기결수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헌병대에 인계돼 총살되었으며 대부분 육군형사법․국방경비법 등을 위반한 징역 3년 이하의 단기수들로 당시 사형수가 아니었다”며 “형이 확정된 기결수를 다시 처형한 것은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고 군법회의는 요식적인 행위였을 뿐 사실상 집단학살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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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16일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을 비롯해 ‘순창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과 ‘불갑산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등 모두 5건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고 국가의 공식사과와 위령사업의 지원 및 군인과 경찰을 대상으로 한 평화인권교육 실시 등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가 5건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해 조사한 결과는 참혹했다. 당시 군경과 치안대는 장티푸스를 앓으며 피난하지 못한 민간인을 움막에 넣어 불태워 죽이거나, 희생자들의 귀를 잘라가는 잔혹성을 띠기도 했다. 특히 희생된 민간인들은 적법한 재판도 없이 개인적 감정이나 자의적 판단으로 집단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산청외공리 민간인학살 자료사진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처형”
 

진실화해위원회는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을 조사한 결과,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약 3개월간 당시 충남 서산(現 서산시, 태안군)지역에서 서산․태안경찰서 경찰, 치안대, 해군에 의해 다수의 민간인들이 부역혐의자로 몰려 희생됐다고 발표했다.
 

진실화해위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시 서산경찰서 태안경찰서와 치안대는 1950년 10월 중순부터 12월 사이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부역한 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을 각 읍.면 창고와 경찰서․지서 유치장에 구금한 후 이들 중 ‘처형’으로 분류된 자들을 서산시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해미읍성 동문 밖 방공호, 소원면 신덕리 해안 등지에서 법적 절차 없이 즉결 처형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서산경찰서는 서산읍 부역혐의자들과 서산군 각 면에서 이송된 부역혐의자들을 경찰서 유치장과 읍사무소 창고 등지에 구금해 조사한 후, 처형대상자 300여 명을 서산시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와 수석리 소탐산으로 끌고 가 집단 사살했다.
 

해미면에서는 해미지서 경찰과 치안대가 부역혐의자들을 양조장과 지서 유치장으로 연행해 취조와 고문을 가했으며, 이 가운데 104명을 해미읍성 동문 밖 방공호와 반양리 옻걸이로 끌고 가 집단 사살했다.
 

또 소원면에서는 면치안대로부터 부역혐의자로 추정되는 주민들의 명단을 제공받은 소원지서 경찰이 치안대와 함께 부역혐의자들을 각 마을에서 연행해 면 창고에 구금했으며, 이들 중 192명을 신덕리 해안과 시목리 장재 금광굴, 모항리 만리포에서 사살했다.
 

진실화해위는 이외에도 지곡면, 이북면, 고남면 등 서산지역 20개 읍․면에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처형대상자로 분류된 부역혐의자들이 집단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고, 1950년 10월 8일 해군은 근흥면 정죽리 안흥항에 상륙 중 교전이 발생하자 발포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인근 주민 수십 명을 연행해 조사한 뒤, 이들을 안흥항 인근 바위(現 수협창고)에서 사살했다고 밝혔다.
 

민간인 희생자들은 명확한 처리기준 없이 경찰과 치안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처형대상자로 분류된 것으로도 밝혀졌다. 
 

당시 서산경찰서 사찰계에서 근무한 경찰 역시 “부역혐의자를 처형하는 과정에서 감정적 요소가 많이 개입됐다”고 진술했으며, 팔봉지서 경찰도 “무고하게 처형된 민간인들이 많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산지역에서 부역혐의로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려갔던 20~40대의 성인 남성들로 여성과 청소년도 일부 포함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희생자 중에는 이웃의 권유나 강요에 의해 인민군점령기에 특정한 직책을 맡거나 자신도 모르게 특정 단체에 이름이 올랐던 다수의 사람들도 포함돼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경찰과 치안대, 해군이 적법한 절차 없이 적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의심만으로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국민의 생명을 침해한 불법적인 사건”이라고 밝혔다.
 

서산.태안지역의 민간인 희생자는 추정자 888명을 포함해 총 1,865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진실화해위는,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사건 이후 멸족된 사례 등을 고려하면 이는 최소한의 희생자 수라고 덧붙였다.
 

함양 민간인 희생사건,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로 만들고 총살”
 

진실화해위원회는 ‘함양 민간인 희생 사건’을 조사한 결과,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함양 지역 민간인 86명이 빨치산과 협조․내통하였다는 이유로 국군 제3연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의용전투특공대)에 의해 집단희생 되었다고 발표했다. 
 

1960년 함양『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서류철』

진실화해위원회는 1948년 말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 반란군들이 지리산 자락에서 빨치산 활동을 본격화하자, 당시 지리산지구에서 빨치산토벌작전을 수행하던 국군 제3연대 제3대대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는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함양군 일대와 지리산 등에서 빨치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산간마을을 소개(疏開)하기도 했다고도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함양경찰서는 국군과 함께 반란군을 토벌하며 빨치산과 내통하는 혐의나 식량 보급처로 이용되는 마을 주민을 연행했으며 함양경찰서장의 명령으로 민간인들로 구성된 특공대는 지서의 지휘에 따라 경찰과 국군을 보조하며 마을 동향을 파악하고 민간인들을 연행하기도 했다.
 

또 국군과 경찰, 특공대는 함양읍 등 7개 지역 주민들을 빨치산과 내통․협조하였다는 혐의로 군부대, 함양경찰서, 각 지서 등지로 연행하여 고문과 취조를 한 후 함양읍 이은리에 있는 당그래산과 안의면 공동묘지 등지에서 살해했다.
 

함양군 수동면에서는 1949년 9월 18일 도북리 주민 35명에 이어, 다음날 죽산리 주민 18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지서와 함양경찰서를 거쳐 함양읍에 주둔한 군인들의 취조를 당한 후 도북리 주민 32명은 9월 20일에, 죽산리 주민 17명은 다음 날 군인들에 의해 당그래산에서 집단 사살됐다.
 

안의면 주민들은 1949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군경에 의해 연행돼 당그래산에서 사살됐으며 서하면, 백전면, 휴천면, 지곡면 주민들도 경찰에 의해 연행돼 사살되거나 행방불명됐다. 당시 안의면 특공대로 활동했던 아무개씨는 “잡아온 사람들을 경찰들이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로 만들고 나서 총살시켰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희생자들은 무장한 빨치산들이 마을에 출현하여 식량 등을 요구하였을 때 강압적인 분위기와 협박에 못 이겨 협력할 수밖에 없는 보통의 주민들로 대부분 농사를 짓던 20~40대 남성들이었다”고 밝히고, 이 사건의 가해 주체는 국군 제5사단 제3연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로 확인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은 군경이 빨치산 토벌작전이라는 명분 하에 비무장․무저항의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여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살해한 것은 반인도주의적이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이 밖에 △순창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불갑산지역 민간인희생사건 △담양․장성지역 경찰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등 3건에 대해서도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국가의 공식사과를 권고했다. 

 # 관련기사 : 좌우익으로 나뉜 행방의 기쁨,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 관련기사 : 지리산 자락에서 전하는 58년전 민간인학살

Posted by 구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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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ㅎㅎ 2009.01.19 07: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한민국 경찰놈들이 그렇죠 뭐... 어청수를 보세요 지금도 그렇잖아요? 촛불 하나 들었다고 민주시민을 불법폭도로 몰아부치고 깨부수고 유모차 애기들한테도 분말 소화기를 발사하는 놈입니다.

  2. Favicon of http://blog.daum.net/osaekri BlogIcon 한사의 문화마을 2009.01.19 08: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은 아닐까요?
    이미 부역자 타령을 하고 빨갱이 타령을 하는 조중동에 세뇌된 수구들이 득세를 하고 있는데요?
    그들이 애국자인양 설치는 이 세상이 과연 온전한 세상인가요?

  3. 노씨 2009.01.19 14: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무현 장인에 의해서 우리 양민 11명 죽었다카데...

    좌파 빨갱이 새끼들에 억울하게 죽은 우리 양민이 훨씬 많다

    빨갱이에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 나도 많이 보았다

  4. 뻘갱이 2009.01.19 14: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성이와 그의 똘마이 빨갱이 새끼들에게 우리 양민 참말로 많이 돌아가셨다

    빨갱이 새끼들에게 억울하게 죽은 그들의 한은 누가 달래 주노?

    이 같은 빨갱이 새끼들아... 나는 통곡한다 이 빨갱이 새끼들아

  5. 아오지 2009.01.19 14: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정구-이재정-노무현-김대중-박지원 --- 북한으로 가거라 꺼져 버려라

    가서 정일이와 아오지 탄광에나 가거라

  6. Favicon of http://blog.daum.net/gabinne/12376075 BlogIcon 林馬 2009.02.23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말로 쪼잔한 사람입니다.
    의회 시정질문에 열받아 보복인사를 한다는 것이 시장으로서
    할 일인가요.
    의회도 당신의 발밑창 만큼도 생각하지않다는 증거지요.

  7. Favicon of http://ssbk1094@daum.net BlogIcon 김성섭 2009.02.26 15: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족의 비극적 전시 당시에 범죄 혐의에 대한 법적 판단이나 절차없이 목숨을 빼앗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고 재발되어서는 않된다. 그러나 60여년전의 사건에 대해 군인,경찰에 평화인권교육을 시키라니? [진실화해위]에서 다루는 사건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할때 마다 이사람들은 화성에 사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전시 상황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미화하고 당연한 것으로 치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판단의 기준은 나타난 결과 못지 않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여건 등을 종합판단해서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행정부의 기능도 미약하게 작동하고 있던 당시에 면,리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사건까지 법적절차와 재판등 민주적 절차를 들먹인다는 것은 결국 내얼굴에 침뱃는 격이다. 또 군경이나 특공대,치안대 같은 소위 우파단체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등은 거침없이 국가의 사과와 배상을 권고하면서 공산군이나 리,당인민위원회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가? 참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다. 역사적 사실은 결국 후세의 사가들에 의해 공정하게 결론지어질 것으로 기대하지만 혹 거기에 앞서 이런 판결이나 섣부른 결론이 이들의 판단에 그릇된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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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차 발굴된 외공리 피해자들의 봉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에 대한 실태파악과 진상규명을 위해 유골발굴을 진행하고 있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2008년 유해 발굴지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유해발굴 계획이 확정된 곳은 △산청군 원리 및 외공리 △전남 순천시 매곡동 △ 충북 청원 분터골 및 지경골 △ 경북 경산코발트 광산 △전남 진도군 갈매기 섬이다.


진실화해위는 이들 유해 발굴지 중, 19일 경남 산청군 원리와 외공리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해 먼저 발굴사업을 시작했다. 경남지역에서는 2000년 산청 외공리와 2004년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보도연맹관련 피해자들의 유해들이 민간차원에서 발굴되기는 했지만, 국가주도로 민간인 학살자들의 유해가 발굴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산청군 외공리와 원리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일단 국민보도연맹 피해자는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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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공리 민간인학살 매장지를 둘러보는 관계자들


원리 민간인 피해자들의 경우 1949년 7월18일 덕산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3연대 37명이 빨치산 출몰과 관련해 작전 중 전원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를 계기로 1950년 2월경에 3연대 소속 국군이 시천, 삼장일대 지역 주민을 공비색출 명분으로 집결시켜 적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유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야간에 빨치산이 음식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오고, 낮에는 국군이 마을로 와서 음식을 주었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들을 통비분자로 몰아 죽창과 칼로 처형을 했다고 한다.


이와 달리 외공리 매장지는 1951년 2월과 3월 사이에 장갑차를 앞세운 트럭 3대에 분승한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11대의 버스에 태우고 와서,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소정골에서 총살을 한 후 5곳의 구덩이에 매장한 사건이다.


이런 탓에 외공리 피해자들의 경우는 유족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대해 서봉석 전 산청군 의원은 “2000년 민간단체에서 1차 발굴을 진행한 결과를 보면  유품 중에 나타난 경농 등의 글자가 새겨진 단추와 금니, 실탄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이를 토대로 보면 피해자들은 부유층이며, 1.4 후퇴 당시 이송된 수도권지역 출신 민간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을 했다.


또, 유골을 파악한 결과 어린이와 여성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 가족단위로 끌려와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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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유해발굴 개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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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토제에서 제를 올리고 있는 유족들


이에 앞서 산청군 시천면 덕산중고등학교에서 열린 개토제에는 유족 100여명과 김동춘 교수(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와 이종흡 경남대학교 박물관장, 외공리 대책위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전국유족회 또, 이재근 산청군수, 김민환 군의회의장 등이 참석했다.


김동춘 상임위원은 인사말을 통해 “왜 누가 그 사람들을 집단 살해했을까. 무엇이 두려워서 은밀하게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왜 어린이와 부녀자까지 죽였어야 했을까 하는 그 진실을 파 헤지기 위해 첫 삽을 뜬다.”고 말하고, 이를 통해 “유족들의 한을 풀고 진실규명과 위령 화해사업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유해발굴의 목적을 설명했다.


또, 김종현 전국 유족회 상임대표는 추도사를 통해 “반세기가 더 지난 길고 긴 세월이었다.”며 “이제야 겨우 발굴이 이루어지니 만시지탄을 느낀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민간인이 조류독감에 걸린 닭처럼 무참하게 도륙을 당할 지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고 묻고 “산자는 죽은 자의 모습만큼 처참하고 불안하게 살아왔다.”며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해 유족들이 제사라도 지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소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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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념을 올리는 유족들


이번 유해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이상길 교수(경남대 사학과)는 억울한 희생이란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데올로기 문제를 떠나 유해를 발굴하고, 그 발굴과정을 통해 진실을 확보하고 피해자들의 영혼을 달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그는 문화제 발굴기법을 사용해 2개월 정도의 발굴을 예정하고 있다며, 외공리부터 발굴조사에 들어 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번 발굴을 통해 유골이나 유해를 통해서 피학살자들의 신원과 가해자, 그리고 피해자들 중 어린이와 여성들이 있는지 등, 목격자들의 증언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Posted by 구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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