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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60여년만에 드러나는 진주 민간인학살


이번 발굴에서는 54구의 유골이 나왔다. 희생자들의 연령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의 남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해기(80세.진주 하봉면) 할머니는 현장에 도착하자 말자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진주지역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로 추정되는 민간인의 유골이 60여년만에 참혹한 모습으로 세상밖으로 나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30일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가늘골에서 발굴중인 민간인 피학살자들의 유골발굴 현장을 공개했다. 이번 발굴에서는 54구의 유골이 나왔다. 희생자들의 연령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의 남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성고개 3곳에는 150여명이 집단 학살된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진주 주변 각지에 집단으로 학살되어 매장된 민간인들은 대체로 1950년 7월 당시 진주형무소 재소자이거나 한국전쟁직후 예비검속되어 진주형무소에 일시적으로 수감되었던 국민보도연맹원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발굴현장 중간보고회에는 전국유족회와 진주유족회, 마산유족회 소속 유족회, 진실화해위원회 김동춘 상임위원등 관계자가 참석했다.

희생자들은 두 사람이 팔을 서로 교차되도록 손목을 묶인 채 순차적으로 사살됐다.

희생자들은 학살현장 위에서 부터 사살한 후 다시 그 시신 사이로 희생자들을 엎드리게 한 후 사살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가해자는 군인, 희생자들은 국민보도연맹원으로 추정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경남대학교 이상길 교수(사학과)는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1950년 7월 말 희생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목격한 주민들은 3대의 차량으로 끌려와 진성고개와 까치골, 웃법륜골 3개소에서 학살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발굴된 의류품으로 볼 때 이곳에서 학살된 민간인들은 진주형무소제소자가 아니라 국민보도연맹원들로 보인다”며 “가해자는 M1을 소유했던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전쟁 발발당시 M1 소총은 제한된 소수의 군인, 또는 관련자가 소지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국군에 의한 학살이라는 소리다.
 

1950년 당시 이곳으로 끌려와 학살된 희생자들은 발굴현장 윗 열부터 순차적으로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이 교수의 현장설명에 따르면 희생자들은 두 사람이 팔을 서로 교차되도록 손목을 묶인 채 순차적으로 사살됐다. 맨 윗줄에 8명이 2명씩 그 아래 열로 7명 등 아래 방향으로 같은 형태로 질서 있게 쓰러져 있다. 이 교수는 가해자가 희생자들을 학살현장 위로에서 부터 사살한 후 다시 그 시신 사이로 희생자들을 엎드리게 한 후 사살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발굴된 유품으로는 11점의 허리띠와 버클, 38짝의 구두와 작업화, 지퍼, 칫솔, 빗 등이 나왔다. 또, 당시 물약으로 보이는 적은 병도 함께 나왔다. 발굴현장에는 M1소충과 권총의 탄피가 나온 것으로 보아 군인에게 학살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경남대 이상길 교수가 유골발굴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발굴현장에서는 M1탄피등 유류품이 다수 나왔다.

 

진성고개의 민간인 학살사건의 전말 

주민들의 증언과 발굴현장을 종합하여 알려진 진성고개 민간인 학살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 하순(25일 추정) 진주형무소를 출발한 3대의 차량에는 각각 50여명의 민간인과 다수의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민간인이었고 그 중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도 썩혀 있었다. 
 

문산읍을 통과해 현재 한국국제대학을 막 지난 까치골 입구에 1대의 차가 멈추었다. 군인들은 사람들을 끌고 산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고개를 향해 올라가던 2대의 차량 가운데 1대가 현재 발굴하고 있는 가늘골에 서고, 나머지 1대는 200여 미터를 올라가서 웃법륜골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모두 2명씩 짝을 지어 손이 뒤로 묶인 상태였고, 그들의 손목을 묶은 끈은 죄수복을 찢은 천이었다.
 

몇 몇 학살지와 같이 가늘골에서도 구덩이 내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 50여명의 민간인들은 2명씩 뒤로 묶인 상태에서 산으로 올라가 매장지 근처에서 줄지어 서서 죽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맨 먼저 8명이 구덩이의 가장 높은 곳에서 엎드렸고, 뒤에 서 있던 군인들은 총을 쏘았다. 그리고 다음 7명이 먼저 죽은 사람들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두고 엎으렸고 다시 총성이 울렸다. 이러한 과정은 9번이 반복됐다. 학살이 끝난 후 억지로 끌려 온 마을 주민들은 소나무 가지를 덮고 좌우의 흙을 파서 시신위를 간단하게 덮는 것으로 모든 것은 마무리됐다.
 

당시 까치골과 가늘골은 문산에서 온 주민들이 시신을 매장하는데 동원됐고, 웃법륜골은 진성에서 온 주민들이 시신을 매장하는데 동원됐다. 희생자들을 싣고 온 차가 마을 주민들을 태우고 왔고, 주민을 동원하는 과정에는 현지 경찰도 참여했다.

유족들이 학살현장에서 발굴된 유골들을 바라보고 있다.

발굴현장 설명회에는 진실화회위원회와 전국유족회,진주유족회,마산유족회 등 회원들이 참석했다.

 

유족들의 통곡 

이해기(80세.진주 하봉면) 할머니는 현장에 도착하자 말자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그는 결혼 3년 만에 국민보도연맹으로 남편을 잃었다. 당시 남편의 나이는 21세. 1950년 음력으로 6월1일 남편은 친척집으로 상망제( 3년 상에서 보름 만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군 입대 1주일을 남겨놓고 있던 남편은 경찰서에 잡혀있다는 이유로 입대를 하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부친을 잃은 성증수 할머니는 이곳을 지날 때 마다 머리를 조아리고 다닌다고 했다. 혹시나 선친이 유골이 여기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오늘도 그는 ‘개승만’을 연신 외치면 당시 정권에 대한 극도의 증오감을 나타냈다.
 

김동춘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은 “유족과 위원회가 머리를 맞대로 학살현장을 통해 아픈 역사를 알려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억울한 분들을 기억하고 알려내는 사업을 계속해야 한다며 청와대에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특별법 제정과 조사 발굴 사업이 계속 이루어지도록 요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편, 가늘골의 매장지는 과수원 소유자인 이봉춘 할머니의 제보로 알려졌다. 이 할머니는 1980년대 초반 산을 매입하면서 당시 산주로부터 이곳이 학살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금까지 원상을 유지하면서 관리해 오고 있었다. 

유해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경남대학교 박물관은 가늘골에서의 발굴이 끝난 후 나머지 2개소에 대해서도 발굴 작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