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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 만들고 총살시켰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16일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을 비롯해 ‘순창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과 ‘불갑산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등 모두 5건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고 국가의 공식사과와 위령사업의 지원 및 군인과 경찰을 대상으로 한 평화인권교육 실시 등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가 5건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해 조사한 결과는 참혹했다. 당시 군경과 치안대는 장티푸스를 앓으며 피난하지 못한 민간인을 움막에 넣어 불태워 죽이거나, 희생자들의 귀를 잘라가는 잔혹성을 띠기도 했다. 특히 희생된 민간인들은 적법한 재판도 없이 개인적 감정이나 자의적 판단으로 집단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산청외공리 민간인학살 자료사진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처형”
 

진실화해위원회는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을 조사한 결과,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약 3개월간 당시 충남 서산(現 서산시, 태안군)지역에서 서산․태안경찰서 경찰, 치안대, 해군에 의해 다수의 민간인들이 부역혐의자로 몰려 희생됐다고 발표했다.
 

진실화해위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시 서산경찰서 태안경찰서와 치안대는 1950년 10월 중순부터 12월 사이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부역한 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을 각 읍.면 창고와 경찰서․지서 유치장에 구금한 후 이들 중 ‘처형’으로 분류된 자들을 서산시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해미읍성 동문 밖 방공호, 소원면 신덕리 해안 등지에서 법적 절차 없이 즉결 처형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서산경찰서는 서산읍 부역혐의자들과 서산군 각 면에서 이송된 부역혐의자들을 경찰서 유치장과 읍사무소 창고 등지에 구금해 조사한 후, 처형대상자 300여 명을 서산시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와 수석리 소탐산으로 끌고 가 집단 사살했다.
 

해미면에서는 해미지서 경찰과 치안대가 부역혐의자들을 양조장과 지서 유치장으로 연행해 취조와 고문을 가했으며, 이 가운데 104명을 해미읍성 동문 밖 방공호와 반양리 옻걸이로 끌고 가 집단 사살했다.
 

또 소원면에서는 면치안대로부터 부역혐의자로 추정되는 주민들의 명단을 제공받은 소원지서 경찰이 치안대와 함께 부역혐의자들을 각 마을에서 연행해 면 창고에 구금했으며, 이들 중 192명을 신덕리 해안과 시목리 장재 금광굴, 모항리 만리포에서 사살했다.
 

진실화해위는 이외에도 지곡면, 이북면, 고남면 등 서산지역 20개 읍․면에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처형대상자로 분류된 부역혐의자들이 집단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고, 1950년 10월 8일 해군은 근흥면 정죽리 안흥항에 상륙 중 교전이 발생하자 발포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인근 주민 수십 명을 연행해 조사한 뒤, 이들을 안흥항 인근 바위(現 수협창고)에서 사살했다고 밝혔다.
 

민간인 희생자들은 명확한 처리기준 없이 경찰과 치안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처형대상자로 분류된 것으로도 밝혀졌다. 
 

당시 서산경찰서 사찰계에서 근무한 경찰 역시 “부역혐의자를 처형하는 과정에서 감정적 요소가 많이 개입됐다”고 진술했으며, 팔봉지서 경찰도 “무고하게 처형된 민간인들이 많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산지역에서 부역혐의로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려갔던 20~40대의 성인 남성들로 여성과 청소년도 일부 포함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희생자 중에는 이웃의 권유나 강요에 의해 인민군점령기에 특정한 직책을 맡거나 자신도 모르게 특정 단체에 이름이 올랐던 다수의 사람들도 포함돼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경찰과 치안대, 해군이 적법한 절차 없이 적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의심만으로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국민의 생명을 침해한 불법적인 사건”이라고 밝혔다.
 

서산.태안지역의 민간인 희생자는 추정자 888명을 포함해 총 1,865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진실화해위는,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사건 이후 멸족된 사례 등을 고려하면 이는 최소한의 희생자 수라고 덧붙였다.
 

함양 민간인 희생사건,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로 만들고 총살”
 

진실화해위원회는 ‘함양 민간인 희생 사건’을 조사한 결과,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함양 지역 민간인 86명이 빨치산과 협조․내통하였다는 이유로 국군 제3연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의용전투특공대)에 의해 집단희생 되었다고 발표했다. 
 

1960년 함양『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서류철』

진실화해위원회는 1948년 말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 반란군들이 지리산 자락에서 빨치산 활동을 본격화하자, 당시 지리산지구에서 빨치산토벌작전을 수행하던 국군 제3연대 제3대대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는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함양군 일대와 지리산 등에서 빨치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산간마을을 소개(疏開)하기도 했다고도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함양경찰서는 국군과 함께 반란군을 토벌하며 빨치산과 내통하는 혐의나 식량 보급처로 이용되는 마을 주민을 연행했으며 함양경찰서장의 명령으로 민간인들로 구성된 특공대는 지서의 지휘에 따라 경찰과 국군을 보조하며 마을 동향을 파악하고 민간인들을 연행하기도 했다.
 

또 국군과 경찰, 특공대는 함양읍 등 7개 지역 주민들을 빨치산과 내통․협조하였다는 혐의로 군부대, 함양경찰서, 각 지서 등지로 연행하여 고문과 취조를 한 후 함양읍 이은리에 있는 당그래산과 안의면 공동묘지 등지에서 살해했다.
 

함양군 수동면에서는 1949년 9월 18일 도북리 주민 35명에 이어, 다음날 죽산리 주민 18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지서와 함양경찰서를 거쳐 함양읍에 주둔한 군인들의 취조를 당한 후 도북리 주민 32명은 9월 20일에, 죽산리 주민 17명은 다음 날 군인들에 의해 당그래산에서 집단 사살됐다.
 

안의면 주민들은 1949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군경에 의해 연행돼 당그래산에서 사살됐으며 서하면, 백전면, 휴천면, 지곡면 주민들도 경찰에 의해 연행돼 사살되거나 행방불명됐다. 당시 안의면 특공대로 활동했던 아무개씨는 “잡아온 사람들을 경찰들이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로 만들고 나서 총살시켰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희생자들은 무장한 빨치산들이 마을에 출현하여 식량 등을 요구하였을 때 강압적인 분위기와 협박에 못 이겨 협력할 수밖에 없는 보통의 주민들로 대부분 농사를 짓던 20~40대 남성들이었다”고 밝히고, 이 사건의 가해 주체는 국군 제5사단 제3연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로 확인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은 군경이 빨치산 토벌작전이라는 명분 하에 비무장․무저항의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여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살해한 것은 반인도주의적이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이 밖에 △순창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불갑산지역 민간인희생사건 △담양․장성지역 경찰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등 3건에 대해서도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국가의 공식사과를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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