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민간인학살 사건을 소재로 한 다큐 영화 ‘해원’과 ‘레드 툼’을 비메오 온디맨드 유료서비스로 상영합니다.


영화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가린 학살의 역사”, “아직도 과거가 되지 못한 과거”를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 


비메오에서 다큐멘터리 장르를 선택하시고 영화제목, 또는 ‘구자환’을 검색하시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해원-영문] https://vimeo.com/ondemand/148951 


[레드 툼-한글] https://vimeo.com/ondemand/g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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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해원] 첫 주차 개봉관 목록입니다.  

해방이후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던 민간인학살을 소재로 한 영화 <해원>은 오는 5월 10일 전국 극장에서 동시 개봉됩니다.

 

■서울:CGV 압구정/CGV 명동역/인디스페이스/롯데시네마 월드타워 
/롯데시네마 청량리/아리랑시네센터/필름포름 /아트홀 가얏고을(17일 개봉) 
■인천:추억극장 미림/영화공간 주안/메가박스 검단/메가박스 인천논현
■경기 파주:헤이리시네마/메가박스 파주금촌/메가박스 시흥배곧
■경기 고양:고양 영상미디어센터(예정)
■강원도 강릉: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대전:대전아트시네마/롯데시네마 대전둔산
■충남 천안:인디플러스 천안/메가븍스 천안
■광주:광주독립영화관 기프트/광주극장 (17일 개봉)
■전북 전주:메가박스 전주/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16일 개봉) 
■전남 목포:목포 시네마라운지 MM 
■대구:오오극장
■경북 포항:인디플러스 포항(17일 개봉)
■경북 안동:안동중앙시네마
■부산:영화의 전당/CGV 서면/메가박스 서면
■울산:메가박스 울산
■경남 창원:시네아트 리좀/CGV 창원/메가박스 창원
■제주:메가박스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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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 네이버 영화정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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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영화 <레드툼>은 비메오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유튜브에 올렸던 <레드툼>이 삭제되어서 비메오 영화서비스로 유료전환합니다.

아래는 비메오 링크 주소입니다.

 

영문자막 https://vimeo.com/ondemand/redtomb2

한글자막 https://vimeo.com/ondemand/gjh

 

줄거리 (Synopsis)

 

해방이후부터 53년 휴전을 전후한 기간 동안에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그 속에는 지방좌익과 우익의 보복학살도 자행되었지만, 많은 피해자들은 남한의 군경, 우익단체, 미군의 폭격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이 가운데 한국전쟁 초기 예비검속 차원에서 구금당하고 학살을 당한 국민보도연맹원이 있다.

 

전국적으로 23~45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고, 정치이념과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국가가 만든 계몽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과는 직접적인 상관없이 국가의 이념적 잣대로 인해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이다.

 

국민보도연맹은 해방 후 1948년 이승만 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해 고안해낸 좌익 포섭단체였다. 조직결정의 대외적인 명목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고, 조직의 이름도 보호하여 지도한다.”는 뜻인 보도연맹으로 했다.

 

민간단체 성격이었던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각 지역에서 지부가 구성되면서 관변단체로 변하게 된다. 보도연맹원의 구성은 좌익 활동한 사람뿐만 아니라 공산당으로 몰릴만한 여지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국민보도연맹의 가입대상이었다. 그러나 각 지방행정구역 단위당 할당제를 실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에 관계없이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다.

 

보도연맹 학살은 한국전쟁 개전 초기인 19507~8월에 걸쳐 북한군이 점령하지 않은 비전투지역에서 이뤄졌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예비검속자로 몰리게 된다.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모아 놓고 전국 각 지역 계곡에서 무차별 학살하거나 바다에 수장을 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 학살 주체는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위대였던 특무대(CIC)와 헌병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과 우익단체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일관된 명령체계에 의해 자행된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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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전후 경남 함안지역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합동위령제가 29일 함안 문화원에서 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5월19일 함안지역 미국폭격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는 한편, 같은 해 11월17일 에는 함안지역 국민보도연맹사건에 대해서 진실을 규명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함안지역은 미군폭격사건으로 최소 200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또,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450여명, 그리고 마산, 진주, 부산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으로 3417여명의 (국민보도연맹원 포함)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된 것으로 조사됐다. 
 

진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래패 '맥박' 추모공연.

민간인 희생자들의 영령을 모시는 고유제.


이 날 위령제는 기독교와 천주교, 원불교와 불교의 순서로 진행된 추모행사에 이어, 고유제로 희생자들의 영령을 모신 가운데 진행됐다.

이춘근 함안유족회 대표는 인사말을 통해 “따뜻한 동포애나 다정한 가족애 보다는 사상이나 정치이념에 더 큰 가치를 부여했던 혼돈의 시대에, 국가는 이데올로기의 의미조차도 모르는 이들에게 멍에를 뒤집어씌우고 집단참살 했지만,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해자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조사기간 연장을 요구했다.

퇴임식을 뒤로 하고 위령제에 참여한 조영규 군수는 “좌익, 우익의 사상적 대립 속에 오욕을 뒤집어 쓴 채 희생되었던 선량한 민간인 희생자 영령 앞에 고개를 조아린다”며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명예훼복에 힘써 나가겠다”고 말했다.

이영조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의 추도사는 김진원 조사국장이 대독했다. 유족들은 위원장이 공식행사에 한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고 있다며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영조 위원장은 추모사를 통해 “이 참담한 사건을 돌이켜 보면서 비록 국가의 존립자체가 위협받는 비상한 상황이었다고는 하나 국민의 생명권이 경시되는 일은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다지게 된다”며 “60년 전의 사건을 교훈삼아 다시는 이 같은 참상이 되풀이되지 않게 우리 모두 노력할 것을 다짐한다”고 말했다.

김태영 국방부 장관의 추모사에 이어 윤호상 전국유족회 공동대표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령들의 시신수습과 못 다한 유해발굴이나 위령제에 대해서 이 정부는 굳게 입을 다문 채 함구하고 있다”며 “유엔과 세계 인권위원회 및 NGO와 전 세계 언론에 우리의 실정을 알려서 정부에 압력을 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취임식을 하루 앞둔 김두관 경남지사 당선자의 격려사는 강병기 정무부지사 내정자가 대독했다.

김두관 당선자는 “국가가 나서서 민간인에게 남겨진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점이 매우 아쉽다”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적극 나서서 유가족의 아픔을 위로하도록 노력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위령제는 종교의식과 함께 진혼무로 희생자들의 넋을 달랬다.

민간인학살 유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한편, 진실화해위원회는 30일 공식조사활동을 마무리한다. 참여정부시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 의해 2005년 12월 설립된 진실화해위원회는 2006년 4월부터 진실규명 조사를 시작했다. 
 

Posted by 구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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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개인적으로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면서 오늘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북파되어 임무를 수행하다 귀환한 북파공작원이 오히려 이중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한 사실을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혔습니다. 특수임무수행자 단체에 계신 분들이 여전히 반공논리에 갖혀 있는 것은 안타깝기도 하지만, 한 개인의 억울한 사연이 밝혀진 것은 무척이나 다행한 일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를 보니  ‘특수임무수행자 심문규 이중간첩사건’은 북파됐던 특수임무수행자가 귀환한 뒤 자수했으나, 육군첩보부대(HID)는 이를 위장 자수한 것으로 판단하고 처형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간첩심문규 심문경위’에 들어 있는 위장자수의 근거들은 북파공작원 심문규를 위장자수로 몰기위해 조작되었다는 것이지요. 

자료사진 : 이경재의원실


북파공작원인 심문규는 1955년 9월 동해안을 통해 북파된 뒤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군에 체포되어 약 1년 7개월 동안 북한에 머물면서 대남간첩교육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1957년 10월 남한 육군첩보부대 기밀탐지 및 요인암살 등의 지령을 받고 다시 남하했지만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육군첩보부대에 자수를 했다는군요. 

그런데 육군첩보부대는 심문규를 563일 동안 불법구금한 상태에서 심문 또는 북에 대한 정보입수, 남파간첩 검거 등에 활용한 후 육군특무부대에 사건을 이관했다고 합니다.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육군특무부대 또한 심문규에 대한 재판권이 일반법원에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군사기밀 등의 이유를 들어 사건을 군검찰에 송치했고, 군검찰도 이를 묵인한 채 중앙고등군법회의에 기소해 결국 1961년 5월에 대구교도소에서 처형했다고 합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처형의 근거가 된 ‘간첩심문규 심문경위’는 ‘위장 자수한 것’을 드러낼 목적으로 사실과 다르게 만들어 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심문규가 남파 당시 간첩할 의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심문규의 주관적인 의사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가운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도 역시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남북대립의 시기에 억울하게 희생된 것이죠.

진실화해위원회의 맨트를 빌리자면 당시 첩보부대 장교 등은 “첩보부대는 북파공작원이 공작활동 중 체포되어 간첩교육을 받고 내려온 경우, 즉시 자수하였더라도 특무부대 등 수사기관에 넘기지 않고 북한에 대한 정보 입수, 간첩검거, 간첩선 검거 등에 2년 정도 활용한 후 다시 북파를 시켰다”고 진술했다고 합니다. 이를 거절하는 경우 제거하거나 군사재판에 회부해 사형시키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심문규씨와 같은 북파공작원은 냉전의 시기에 남북대결 구도에 의해 인권은 커녕 국가의 보호조차도 받지 못한 채 도구로서만 활용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료사진 : 이경재의원실


자료사진 : 이경재의원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이 사건에 대해 국방부는 심문규의 사형이 집행된 사실 조차 가족에게 통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재까지도 가족에게 시신을 인도하지 않고 있고 가족들도 2006년 4월에야 심문규씨가 사망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하나가 더 있군요. 육군첩보부대는 북파한 심문규가 귀대하지 않자, 부대에서 숙식하면서초등학교에 다니던 당시 8세인 아들에게 아버지를 만나게 해 준다며 제식훈련, 산악훈련을 비롯한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시켰다고 합니다. 

남북대결의 시대, 반공논리에 사로잡혀 인권이 무시당했던 현실을 다시 접하면서 안타까움이 입니다. 그 안에는 북파공작원들도 있고,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들이 있으며, 부역혐의로 몰려 당시 남측과 북측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들이 있습니다. 역사가 반복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Posted by 구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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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log.jayuin.co.kr BlogIcon 자유인 2009.09.15 11: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냉전시대의 비극입니다.
    저런 분들도 억울하지만 국군 포로 송환이나 생사여부에 대한 목소리가 우선은 더 커야 한다고 봐요//
    저도 특수부대에서 좀 오랜기간 근무를 했습니다만, 민간에서 들이대는 이런 글 따위(?) 신경안씁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의 안위겠지요?
    한생각 돌리세요.^^

    • 미친 ㅡㅡ 2010.01.01 1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한생각 돌리라고?? >>이런 글 따위(?) 신경안씁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의 안위겠지요?<<

      어이가없네요. 뭘한생각 돌려요?? 님아버님께서

      북파공작원이시라면 이런소리 할수있나요?

      남일이라고 진짜 함부로 말하네 뭐이도저도 아무말도

      못하고 찍박아져만있으실거면 그냥 가만히있으세요

      하는것도없으면서 괜히 무게잡으시네

  2. Favicon of http://blog.daum.net/mylovemay BlogIcon 실비단안개 2009.09.15 13: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도구일 뿐이었군요.

    훈련을 받은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Favicon of http://go.idomin.com BlogIcon 파비 2009.09.15 14: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제가 북파공작원들이랑 해수욕장 백사장에서 축구를 해본 경험이 있는데요. 3년 전이네요. 한 세시간 찼나? 환갑 넘은 아저씨가 20대 애들도 못 따라가겠더라니까요.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곳에서. 확실히 대단하긴 하더군요. 술이 들어가니까 울더군요. 너무 순수하고 착해 보였지요. 종로거리에서 가스통 차고 시위하던 모습과는 딴판이더구먼요. 이중적인 모습이지만, 이 또한 역사의 아픔이죠. 저는 사실 그분들이 오리지날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아는 정도에요.

  3. Favicon of http://hotthink.net BlogIcon 구르다 2009.09.15 14: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실미도 말고 또하나의 영화 소재로도 가능한 비운의 역사입니다..

  4. 머루 2009.09.16 08: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나 이사람의 해방이전 약력은 일본군 자원입대에 만주 관동군 소속 첩보활동이 업무였네요...독립군 때려잡던...

  5. 심우영 2009.09.23 0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 하세요
    저는 실제 심문규씨의 손녀 입니다.
    여러분들이 들어도 이렇게 가슴이 찡하고 아픈데
    가족인 저희는 얼마나 아팠을까요. 솔직히 예전에는 제가 어렸을때
    북파공작원이라는 단어 자체도 몰랐습니다.
    근데 이제 점차 한두살 먹으면서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정말 억울하게 돌아 가셨습니다....
    이 일을 밝혀 내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필요 합니다...

  6. 심한운 2009.10.02 15: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선생님 착하고 좋은일 하지 마세요 국가는 돕지를 않읍니다

    바로이사실에 당사자인 심문규씨에 아들 심한운 입니다 옛날에 남대문 문지방 나무에 대한 경언에 숫자가 우세한쪽이 직접가서 경험하고 확인한 사람을 병신 만드는것 거짓말 쟁이로 만드는건 시간문제다 본인이 못하면 다른쪽도 못하고 본인상상이 부정이면 상대들도 그려너니 하고 못밖는건 삼가해야 할것이다 위제목에 말은 내가 양부모님 양부친 진동식 양모친 서삼순 이분들을 알게된 시작은 1971년 3월4일 나는 나에딸 한식구를 얻게되어 너무기뻐 알리기는 알려야 하는 데 자랑할 만한데가 없어다 그럴수록 어릴때 헤어진 남동생이 얼나 좋와할까 하는 생각에 나는 늦게라도 찿아서 보여주고 싶어 이곳저곳 귀동냥을하며 춘천 샘밭까지 확인 했지만 헛탕이었다 할수없이 삶이라는 벽을 넘기위해 도중하차를 하고 서울 상도동 귀가 그후 1973년 예상치도않은데서 내동생에 소식을 전해듣게되다 동기는 나와같은 양화일을 하는 아현동친구가 야니동생 양고모 아들이 내친군데 니동생 양부모가 너를 찿아 다닌다는 데 만나보라는 말을 듣고 꿈인지 생시인지 정신이 멍멍했다 항상 술좌석이나 외로울 때면 떠들어댓던 과거사가 메아리쳐 돌아온것이다 나는 불야불야 준비를 하고 마장동 시외뻐쓰 터미널에 내려 화천행을 타고 내동생 모습에 상상을 떠올리며 화천에 도착해 진동식 존암을 대며 찿았다 바닥이 좁아 찿기가 쉬웠다 길가에 있는 주막에서 친구분과 약주를 하시던 양부친이 내동생 이름을 대며 형댑니다 그러자 부친께서 형제라 닮은데가 많군 하시며 엄마한테 가자 하시며 앞서안내 하기에 동생을 만난다는 생각으로 꽉찬 나는 골목어귀로 들어서는 양부친을 따라 들어서니 헌 함석 싸리문으로 좁은골목 안쪽집을 향해서 여보 효철이 형왔어 잠시후 왠노인이 맨발로 뛰어나오며 이놈아 어디같다가 인제와 하며 끌어않고 울어댓다 나는 엄마 아버지란 단어가 생소하다 어느정도우시고나서 양부친에게 물어본다 누구냐고 부친은 효철이 형이야 그래 들어가자 하시며끈다 방에들어가 조심스레 동생 어디가냐고 물어봤다 그소리가 나오자 두분은 대성통곡을 하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갑자기 닥쳐온 순간을 감지를 못하고 있을 때 양모친께서 우리둘만 나기고 가버렸다 하며울기에 나는 무었을 알아찿리고 친부모를 찿아 집으 나간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과는 정반대 였다 얼마전에 병원에서 수술하고 6달만에 죽었다고한다 기대했던 내심정은 산산이 흐트려져 증발했다 그런인현으로 나는 두분을 동생대신 모셔야만되다 그러던 19년전 양부친께서 타게하셨다 나는 상주로써역활을 하고 돌아오려는데 양모친은 아범아 이집을 아범앞으로 이전했으면하신다 그리고 나에호적도 당신 앞으로 옮겨으면하신다 나는 조심스레 거절했다 섭섭하신것같다 나는 심시가문에 장손이기때문이다 그후 지금을로부터 10년전 양모님도 타게하셨다 이웃에서 집을 비워놓지말고 조치하라는 성화다 나는 집을 수리하여 세를 놓고 동네분들에게 사실을 말씀드렸다 사실은 친아들이 아니라고 죽은 동생도 양자로 왔노라고 사람들은 수근거린다 집나가던 아들이 돌아 왓다고하여 정말인줄 알아았는데 그후 주위분들에 그집을 상속받기위해 화천에서 20여분 본인이 살고있는 남양주에서 20여분 증인을 받고 내동생과 헤여진 사연 야부모니을 모시게된 게기를 다음과같이 올려다[ 1955년 나는 북파공작원 교육대장으로 가셔서 소식이없던 아버지를 기다리다 어머니는 큰외삼촌에게 식량구걸을 갔다가 노여워하시는 외삼촌에 꾸지람을 듣고 약잡수고 돌아가시어 나는 아버지를 만나기위해 강원도 고성 초도리 김일성별자아래 36지구대 소속 65지대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중 아버지가 오시지 않자 아버지 에게 데려가준다며 북파교육을 받았다는 이야기와 그리고 65지대를 어렵게 빠져나오게된이야기 지금은 현집에서 같이지내지만 양모친은 당신집에서 제사를 지내기 원하셔서 명절이나 추석때는 우리부모님 제사를 모시고 다시화천으로 가서 제사를 모셨던 사실을 적어올다 얼마후 출두날짜에 법원에 도착하니 판사님은 일어서 어서오세요 하시면서 참고생많이 하셨네요 하시며 사망신고 할때에 신고자이름을 대시며 이사람은 누구냐고 묻기에 양어머니 친정조카라고 하자 그러면 이사람 주민 등록을보내 주실수 있었요 네 하고 조카에게 연락을 하여 주민등록을 제출한후 얼마후 출두 시간마춰 출두한바 판사님 말씀 조카가있었서 상속이 안됩니다 그렇읍니까 알겠읍니다 돌아서 나왔다 변호사가 뒤를 따라나오며 선생님 앞으로 착하고 좋은일 하지마세요 국가는 돕지를 않읍니다 나는 이글을 쓰면서 분노를 수없이 삼킨다 우리아버지는 일본군에 가고싶어서 입대한것이 아니다 그당시 담임선생이 비행기조종사모집을 부추기며 감언이설로 입대시킨것이다 17살때 앞서 자기식대로에 자대로 남에 영혼을 흔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에 아버지는 조국을위해 무었을 했는가 아니면 조국발전을 위해 부동산 투기를 일삼아왔는가 뒤를 돌아보고 타에 일에 비방하라

  7. WSHKKR 2010.01.23 2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육군첩보부대님 이글을 읽고 아직도 늟지 않앗으니 서로 힘을 합쳐 전에 간첩몰린 억울하게 돌아가신분들 위해서 전에 교관 및 청와대 특별명령자 색출하여 끝까지 추적 하셔서 일가족들 구석구섯 파해쳐서 잔인하게 죽여야 합니다 자녀들까지 잔인하게 죽여야지요 얼마든지 맘만 먹으면 쥐도 새도 없이 죽여야만 억울하게 돌아가신분들 위해서 한을 풀어 드려야지요

  8. Favicon of http://kij1955@chol.com BlogIcon yys550521 2010.08.27 12: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해방.육이오.그러나 현실이 다급 합니다.성경의 구약성서 신약성서 현 21세기 현제현실 중요한 시대적 정신 각자 고취 하여야 한다는 세계적 추세입니다. 구약의 생명 .그리고 아담과하와 에덴의 동쪽 지금 어린 청소녀 성 문제 잘못된 어른들의 성관리로 인하여 잘못된 사회 구성 그럼 지금 우리의 어린자식들 어떻게 키우며 앞으로 한민족 사회 는 어디로 간다는 메체 방송보도 학생들의 보도는 하면서 지나간 전쟁의 상처 그야물론 경험으로 간직하시고 대대적인 홍보와보도 는 어른들의 바른 도덕성.윤리 를 바로 잡아야 하여야 할것이다는 다수분들의 생각 이라 하여도 후회는 안하리라 할것입니다.그럼 21세기 (신약) 말씀 으로 살것이라.함은 이시대적은 듣기평가 시대라 하여도 부족 하지아느리라. 잘못된 기성세대들의 관행 속은 검정색 겉은 하얀색 요즈음 어린아이들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되어다함.부모의 디엔에이가 안이라 홍보메체 에서 보고 듣고 바로 배운다.예 xx라고 길거리나 가정에서 한다면 바로미터 입니다.좋은 환경 이란 행동과 도적적 윤리에서 나온다.겉은 하얀 천사이고 속은 저승사자 라면 이사회 비젼과 희방은 ...이글접하시는 여러분 이제 생각을 긍정적이고 마음에 담아 베이비 처럼 서로 주고 받는다면 종교.정치.경제가 새로운 옷으로 단장 하리라 좋은 생각으로 중추절 잘보내시고 안전한 생활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m 의 가오가 각가정 마다.사회 나라 지구촌 ...대전 대덕구 법2동 삼성 전자 에이에스 에서 尹汝心

  9. BlogIcon 남현 2016.01.05 10: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은 전부 UDU 사진이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이하 진실화해위)는 전남 화순지역에서 한국전쟁기 인민군과 지방좌익, 그리고 국군과 경찰에 의해 308명의 민간인이 집단학살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18일 밝혔다.

이번 진실규명결정은 ‘화순지역 빨치산 등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 ‘화순지역 경찰에 의한 민간인희생 사건’,  ‘전남지역(화순․담양․장성․영광) 11사단 사건’이다. 

진실화해위의 조사결과 이들 중 인민군에 의한 희생자는 143명, 그리고 11사단 국군의 의해 103명, 경찰에 의한 희생자는 62명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수치는 사건이 발생한지 60여 년이 지난 뒤,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된 사건에 대한 조사 통해 확인된 최소한의 결과로  일가족이 몰살됐거나 타 지역으로 이주, 진실규명 신청을 하지 않은 경우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순지역을 사례로 조사한 결과, 좌우익세력의 구분 없이 만삭의 임산부를 비롯해 젖먹이 유아와 노인, 장애인 등 지역주민들을 무차별적이고 잔인하게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일가족이 한꺼번에 희생되거나 집 안의 노인과 장애인들이 불에 타 죽는 등 전쟁의 잔혹성도 그대로 나타났다.

진실화해위는 “전남 화순지역은 한국전쟁기에 지역 주민들이 점령세력에 따라 번갈아 희생된 사례는 당시 전국적으로 발생한 현상이었다”며 “좌우대립이 심하지 않았던 화순지역에서도 수많은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는데, 이는 전쟁으로 인해 이성을 잃은 잔인한 현실을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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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좌익과 인민군에 의한 학살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에 따르면 화순지역에서는 1950년 7월께 인민군이 점령한 이후, 지방좌익에 의해 1명의 행방불명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인민군 퇴각기인 9월 말에는 광주형무소와 화순내무서에 갇힌 12명의 경찰과 대한청년단원, 공직자 등이 정치보위부원과 자위대원, 인민군에 의해 화순저수지에서 희생됐다.

또한 1950년 10월부터 1952년 4월 사이에는 빨치산과 군경토벌대간의 교전이 벌어지면서 화순 지역주민들은 군경에 협조했다거나,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좌우세력에 의해 번갈아 희생되었다. 그 숫자는 295명으로 밝혀지고 있다.

화순지역에서의 빨치산에 의한 희생자들은 1950년 1월 초부터 발생했다. 군경 가족이나 대한청년단원 등 우익인사들이 그 대상이었다. 또 공무원가족이라는 이유로 10살 미만의 어린이와 여성 등 일가족 19명이 살해되었으며, 경찰의 지시로 전선과 전주를 지키던 주민들도 빨치산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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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과 경찰에 의한 학살

경찰에 의한 화순지역 희생자는 1950년 10월 중순 경부터 발생했다. 당시 민간인들은 무차별로 총을 쏘며 마을로 진입하는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지서가 피습을 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청년 10여 명이 본보기로 사살됐다. 또한 야간에 빨치산에 의해 전주가 잘렸다는 이유로 경비를 맡은 주민을 경찰이 사살하기도 했다.

이 밖에 담양, 장성, 영광지역에서는 1950년 10월 말부터 국군 11사단에 의해 수복작전이 벌어지면서 학살이 일어났다.  이들 지역에서 국군에 의한 희생자는 담양 94명, 장성 67명, 영광․함평에서 27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당시 국군 11사단은 마을에 진입해 가옥에 불을 지르거나, 주민들을 끌어내 부역혐의자 가족과 청장년 등을 사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지휘관의 명령과 사전교육에 따라 작전지역 주민들을 적으로 간주해 사살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또, 부역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인민군복으로 위장한 채 마을에 진주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각 지역의 민간인 희생자들은 가해주체가 인민군이든, 국군이든, 경찰이든 간에 전쟁 참극에 의한 희생자라는 점에서 동일하다며, 국가에 대해서 이들 희생자들을 위한 사과와 더불어 합동으로 위령하도록 하고 참상을 널리 알리도록 권고했다.


Posted by 구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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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2kim.idomin.com BlogIcon 2009.08.19 18: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군'이라고라?


이번 발굴에서는 54구의 유골이 나왔다. 희생자들의 연령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의 남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해기(80세.진주 하봉면) 할머니는 현장에 도착하자 말자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진주지역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로 추정되는 민간인의 유골이 60여년만에 참혹한 모습으로 세상밖으로 나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30일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가늘골에서 발굴중인 민간인 피학살자들의 유골발굴 현장을 공개했다. 이번 발굴에서는 54구의 유골이 나왔다. 희생자들의 연령은 대부분 20대에서 30대의 남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성고개 3곳에는 150여명이 집단 학살된 것으로도 추정되고 있다.
 

진주 주변 각지에 집단으로 학살되어 매장된 민간인들은 대체로 1950년 7월 당시 진주형무소 재소자이거나 한국전쟁직후 예비검속되어 진주형무소에 일시적으로 수감되었던 국민보도연맹원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 발굴현장 중간보고회에는 전국유족회와 진주유족회, 마산유족회 소속 유족회, 진실화해위원회 김동춘 상임위원등 관계자가 참석했다.

희생자들은 두 사람이 팔을 서로 교차되도록 손목을 묶인 채 순차적으로 사살됐다.

희생자들은 학살현장 위에서 부터 사살한 후 다시 그 시신 사이로 희생자들을 엎드리게 한 후 사살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가해자는 군인, 희생자들은 국민보도연맹원으로 추정 

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경남대학교 이상길 교수(사학과)는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1950년 7월 말 희생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목격한 주민들은 3대의 차량으로 끌려와 진성고개와 까치골, 웃법륜골 3개소에서 학살된 것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발굴된 의류품으로 볼 때 이곳에서 학살된 민간인들은 진주형무소제소자가 아니라 국민보도연맹원들로 보인다”며 “가해자는 M1을 소유했던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전쟁 발발당시 M1 소총은 제한된 소수의 군인, 또는 관련자가 소지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국군에 의한 학살이라는 소리다.
 

1950년 당시 이곳으로 끌려와 학살된 희생자들은 발굴현장 윗 열부터 순차적으로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이 교수의 현장설명에 따르면 희생자들은 두 사람이 팔을 서로 교차되도록 손목을 묶인 채 순차적으로 사살됐다. 맨 윗줄에 8명이 2명씩 그 아래 열로 7명 등 아래 방향으로 같은 형태로 질서 있게 쓰러져 있다. 이 교수는 가해자가 희생자들을 학살현장 위로에서 부터 사살한 후 다시 그 시신 사이로 희생자들을 엎드리게 한 후 사살하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발굴된 유품으로는 11점의 허리띠와 버클, 38짝의 구두와 작업화, 지퍼, 칫솔, 빗 등이 나왔다. 또, 당시 물약으로 보이는 적은 병도 함께 나왔다. 발굴현장에는 M1소충과 권총의 탄피가 나온 것으로 보아 군인에게 학살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경남대 이상길 교수가 유골발굴 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발굴현장에서는 M1탄피등 유류품이 다수 나왔다.

 

진성고개의 민간인 학살사건의 전말 

주민들의 증언과 발굴현장을 종합하여 알려진 진성고개 민간인 학살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 하순(25일 추정) 진주형무소를 출발한 3대의 차량에는 각각 50여명의 민간인과 다수의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민간인이었고 그 중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도 썩혀 있었다. 
 

문산읍을 통과해 현재 한국국제대학을 막 지난 까치골 입구에 1대의 차가 멈추었다. 군인들은 사람들을 끌고 산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고개를 향해 올라가던 2대의 차량 가운데 1대가 현재 발굴하고 있는 가늘골에 서고, 나머지 1대는 200여 미터를 올라가서 웃법륜골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모두 2명씩 짝을 지어 손이 뒤로 묶인 상태였고, 그들의 손목을 묶은 끈은 죄수복을 찢은 천이었다.
 

몇 몇 학살지와 같이 가늘골에서도 구덩이 내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 50여명의 민간인들은 2명씩 뒤로 묶인 상태에서 산으로 올라가 매장지 근처에서 줄지어 서서 죽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맨 먼저 8명이 구덩이의 가장 높은 곳에서 엎드렸고, 뒤에 서 있던 군인들은 총을 쏘았다. 그리고 다음 7명이 먼저 죽은 사람들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두고 엎으렸고 다시 총성이 울렸다. 이러한 과정은 9번이 반복됐다. 학살이 끝난 후 억지로 끌려 온 마을 주민들은 소나무 가지를 덮고 좌우의 흙을 파서 시신위를 간단하게 덮는 것으로 모든 것은 마무리됐다.
 

당시 까치골과 가늘골은 문산에서 온 주민들이 시신을 매장하는데 동원됐고, 웃법륜골은 진성에서 온 주민들이 시신을 매장하는데 동원됐다. 희생자들을 싣고 온 차가 마을 주민들을 태우고 왔고, 주민을 동원하는 과정에는 현지 경찰도 참여했다.

유족들이 학살현장에서 발굴된 유골들을 바라보고 있다.

발굴현장 설명회에는 진실화회위원회와 전국유족회,진주유족회,마산유족회 등 회원들이 참석했다.

 

유족들의 통곡 

이해기(80세.진주 하봉면) 할머니는 현장에 도착하자 말자 그대로 주저앉아 흐느껴 울었다.
 

그는 결혼 3년 만에 국민보도연맹으로 남편을 잃었다. 당시 남편의 나이는 21세. 1950년 음력으로 6월1일 남편은 친척집으로 상망제( 3년 상에서 보름 만에 지내는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군 입대 1주일을 남겨놓고 있던 남편은 경찰서에 잡혀있다는 이유로 입대를 하지 못하고 희생되었다.
 

부친을 잃은 성증수 할머니는 이곳을 지날 때 마다 머리를 조아리고 다닌다고 했다. 혹시나 선친이 유골이 여기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오늘도 그는 ‘개승만’을 연신 외치면 당시 정권에 대한 극도의 증오감을 나타냈다.
 

김동춘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은 “유족과 위원회가 머리를 맞대로 학살현장을 통해 아픈 역사를 알려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억울한 분들을 기억하고 알려내는 사업을 계속해야 한다며 청와대에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특별법 제정과 조사 발굴 사업이 계속 이루어지도록 요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편, 가늘골의 매장지는 과수원 소유자인 이봉춘 할머니의 제보로 알려졌다. 이 할머니는 1980년대 초반 산을 매입하면서 당시 산주로부터 이곳이 학살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지금까지 원상을 유지하면서 관리해 오고 있었다. 

유해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경남대학교 박물관은 가늘골에서의 발굴이 끝난 후 나머지 2개소에 대해서도 발굴 작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Posted by 구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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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점순(1927년) 할머니를 만난 것은 3월 2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부산·경남지역의 민간인집단학살사건에 대해 피해실태를 공식적으로 확인한 날입니다.  

김주완 기자의 제안으로 할머니를 만나러 나선 것은 진실화해위의 결정문이 나온 터라 할머니의 소회를 듣기 위해서 였습니다. ‘뼈에 사무친다’는 표현으로도 모두 담을 수 없는 한을 지닌 유족의 이야기는 의미가 있기도 했습니다. 
 

황점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영국 BBC에서 제작한 다큐 ‘다 죽여버려(kill'em all)에서도 다루어졌습니다. 그런만큼 미군에 의한 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민간인집단 학살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마산지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제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미군으로 부터 총격을 당했다.

당시 미군은 전투기로 폭격을 하는 동시에 제실과 60~70미터 거리인 이 곳에서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할머니는 1950년 8월13일, 마을 제실로 피신을 한 주민들에게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가한 미군에 의해 곡안리 주민들을 무참하게 학살되던 그날에 시어머니와 아들을 함께 잃었습니다. 당시 미군은 마을 제실로 전투기와 기관총을 동원해 주민들을 학살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목에 큰 부상을 입고 뒷산으로 피신하던 할머니는 다시 총격을 가해 온 미군에 의해 5~6곳에 총상을 입고 쓰러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시어머니는 즉사를 하고 등에 업고 있던 2살박이(추정) 아이도 목숨을 잃은 것이 할머니의 사연입니다. 
  할머니는 이 사건에 앞서서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도 억울하게 남편을 잃어야 했던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2일 만난 할머니는 기대와는 달리 할머니는 차분한 모습이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품어왔던 한을 이제는 벗어버리고 싶다”는 것이 할머니의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지쳤기도 하거니와 팔순을 훌쩍 넘긴 황혼의 나이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현실적인 체념이기도 했습니다. 
 

진실화해위의 결정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 너무 고생했다”며 “돈이 있으면 보답하고 싶다”는 것이 전부였고, 단지 “이제는 너무 늙어서 먹고 싶은 것이나 제대로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이 전부이기도 했습니다. 
 

미군의 총격을 피해 주민들이 달아 난 뒷 산. 이곳에 인민군이 주둔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곡안리 제실

당시의 총알 자국이 남아 있는 우물. 당시 한 소녀는 이 우물 안에에서 숨진채 발견되었다.


그로부터 한 주가 바뀐 7일, 다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한약을 한번 먹어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에 한숨을 내쉬곤 했던 김주완 기자가 할머니 진료를 위해 마산으로 모시자는 제안 때문입니다. 마산시에 있는 이병직 한의원이 할머니를 돕겠다는 약속을 한 모양입니다. 
 

진료를 마친 원장의 이야기로는 할머니는 심혈관질환이 홧병에 기인된 측면이 강하다고 합니다. 수많은 세월, 가슴에 품어 온 한이 홧병을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이제는 ‘팔자’라는 말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누구를 원망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도 하십니다. 그래서인지 나이에 걸맞지 않게 화사한 얼굴을 보이고 계십니다. 
 

이병직 한의원 원장이 황점순 할머니를 돕겠다고 나섰다. 이 날 이병직원장은 할머니에게 한약을 선물했다.


점심을 같이 하면서 당시의 일을 묻고 있었는데, 세상을 받아들인 듯 했던 할머니에게는 끝내 버리지 못하고 있는 미련이 있었습니다. 당시, 총상을 당했던 2살 정도의 아들이 혹시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미련입니다. 할머니 말로는 아이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그것이 부질없는 생각이라고 하면서도 행여나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시더군요. 살아있다면 아들도 이제 61세의 나이가 되는 셈입니다. 
 

세상을 초월한 듯 담담하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다가도,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즈음이면 어김없이 눈시울을 적시는 할머니를 보면서 모정이란 걸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잃은 상처보다도 자식을 잃은 것이 더 가슴에 매인다는 할머니의 눈물을 보면서 전쟁이 가져온 참상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Posted by 구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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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한국전쟁당시 부산·경남지역의 형무소 재소자와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에 대해 국가기관이 피해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부산·경남지역의 민간인학살에 대해 국가가 조사를 통해 실태를 공식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위원장 안병욱)은 2일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부산․마산․진주형무소 등에 수감된 재소자와 민간인이 육군본부 정보국 CIC(특무대), 헌병대, 지역경찰, 형무관(교도관)에 의해 불법적으로 희생됐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가 밝힌 희생자는 최소 3,400여 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576명이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부산․경남지역 형무소에서 희생된 대다수의 재소자들은 정당한 법적절차 없이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희생자들은 예비검속된 국민보도연맹원들과 함께 다른 형무소로 이감시
킨다는 이유로 끌려가 산골짜기나 바다에서 수천명이 집단학살 됐다.  

부산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26일부터 9월 25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부산지구 CIC(특무대)와 헌병대, 지역 경찰, 형무관들이 부산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예비검속자 등 최소 1,500여 명을 집단 살해했다. 그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48명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형무소 희생자들은 다른 형무소로의 이감 등을 이유로 끌려간 후, 부산 사하구 동매산과 해운대구 장산골짜기 등지에서 집단 사살됐다. 그 중 일부는 부산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수장된 것으로도 밝혀졌다. 
 

마산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5일부터 9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마산지구 CIC와 헌병대, 지역 경찰 마산형무소 형무관들에 의해 최소한 717명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총살되거나 마산 구산면 앞바다에 대부분 집단 수장되었다. 이들 중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358명이다. 
 

또, 진주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최소 1,200여 명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진주지구 CIC와 헌병대 그리고 진주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집단 살해되었으며,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70명이다. 진주형무소의 희생자들은 진주 명석면 우수리 갓골과 콩밭골, 관지리 화령골과 닭족골, 용산리 용산치,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마산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1950년 9월 1일,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이 희생 현장으로 끌려가기 직전 트럭에 실려 있는 모습 [출처] Picture Post-5086-pub.1950 (by Bert Hardy)


진실화해위는 이번 사건에 대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비점령지역으로 치안이 유지된 부산과 경남지역에서 특별히 위험하다고 할 수 없는 형무소 재소자와 민간인 수천 명을 군경이 일방적이고 임의적으로 집단학살한 것”이라고 말하고 이는 “사상 유례가 없는 비인도적인 행위”라고 말했다.  

또,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나, 대한민국이 통치하고 있던 비전투․비교전지역인 부산․경남지역에서 단순히 남하하는 인민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하여 형무소 재소자들과 민간인이었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불법적으로 살해한 것은 범죄행위”라고 말했다. 
 

진실화해위는 “재소자 가운데 일부의 기결수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헌병대에 인계돼 총살되었으며 대부분 육군형사법․국방경비법 등을 위반한 징역 3년 이하의 단기수들로 당시 사형수가 아니었다”며 “형이 확정된 기결수를 다시 처형한 것은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고 군법회의는 요식적인 행위였을 뿐 사실상 집단학살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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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차 발굴된 외공리 피해자들의 봉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에 대한 실태파악과 진상규명을 위해 유골발굴을 진행하고 있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2008년 유해 발굴지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유해발굴 계획이 확정된 곳은 △산청군 원리 및 외공리 △전남 순천시 매곡동 △ 충북 청원 분터골 및 지경골 △ 경북 경산코발트 광산 △전남 진도군 갈매기 섬이다.


진실화해위는 이들 유해 발굴지 중, 19일 경남 산청군 원리와 외공리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해 먼저 발굴사업을 시작했다. 경남지역에서는 2000년 산청 외공리와 2004년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보도연맹관련 피해자들의 유해들이 민간차원에서 발굴되기는 했지만, 국가주도로 민간인 학살자들의 유해가 발굴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산청군 외공리와 원리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일단 국민보도연맹 피해자는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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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공리 민간인학살 매장지를 둘러보는 관계자들


원리 민간인 피해자들의 경우 1949년 7월18일 덕산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3연대 37명이 빨치산 출몰과 관련해 작전 중 전원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를 계기로 1950년 2월경에 3연대 소속 국군이 시천, 삼장일대 지역 주민을 공비색출 명분으로 집결시켜 적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유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야간에 빨치산이 음식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오고, 낮에는 국군이 마을로 와서 음식을 주었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들을 통비분자로 몰아 죽창과 칼로 처형을 했다고 한다.


이와 달리 외공리 매장지는 1951년 2월과 3월 사이에 장갑차를 앞세운 트럭 3대에 분승한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11대의 버스에 태우고 와서,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소정골에서 총살을 한 후 5곳의 구덩이에 매장한 사건이다.


이런 탓에 외공리 피해자들의 경우는 유족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대해 서봉석 전 산청군 의원은 “2000년 민간단체에서 1차 발굴을 진행한 결과를 보면  유품 중에 나타난 경농 등의 글자가 새겨진 단추와 금니, 실탄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이를 토대로 보면 피해자들은 부유층이며, 1.4 후퇴 당시 이송된 수도권지역 출신 민간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을 했다.


또, 유골을 파악한 결과 어린이와 여성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 가족단위로 끌려와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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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유해발굴 개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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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토제에서 제를 올리고 있는 유족들


이에 앞서 산청군 시천면 덕산중고등학교에서 열린 개토제에는 유족 100여명과 김동춘 교수(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와 이종흡 경남대학교 박물관장, 외공리 대책위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전국유족회 또, 이재근 산청군수, 김민환 군의회의장 등이 참석했다.


김동춘 상임위원은 인사말을 통해 “왜 누가 그 사람들을 집단 살해했을까. 무엇이 두려워서 은밀하게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왜 어린이와 부녀자까지 죽였어야 했을까 하는 그 진실을 파 헤지기 위해 첫 삽을 뜬다.”고 말하고, 이를 통해 “유족들의 한을 풀고 진실규명과 위령 화해사업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유해발굴의 목적을 설명했다.


또, 김종현 전국 유족회 상임대표는 추도사를 통해 “반세기가 더 지난 길고 긴 세월이었다.”며 “이제야 겨우 발굴이 이루어지니 만시지탄을 느낀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민간인이 조류독감에 걸린 닭처럼 무참하게 도륙을 당할 지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고 묻고 “산자는 죽은 자의 모습만큼 처참하고 불안하게 살아왔다.”며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해 유족들이 제사라도 지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소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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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념을 올리는 유족들


이번 유해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이상길 교수(경남대 사학과)는 억울한 희생이란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데올로기 문제를 떠나 유해를 발굴하고, 그 발굴과정을 통해 진실을 확보하고 피해자들의 영혼을 달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그는 문화제 발굴기법을 사용해 2개월 정도의 발굴을 예정하고 있다며, 외공리부터 발굴조사에 들어 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번 발굴을 통해 유골이나 유해를 통해서 피학살자들의 신원과 가해자, 그리고 피해자들 중 어린이와 여성들이 있는지 등, 목격자들의 증언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Posted by 구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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