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민간인학살 사건을 소재로 한 다큐 영화 ‘해원’과 ‘레드 툼’을 비메오 온디맨드 유료서비스로 상영합니다.


영화를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에 가린 학살의 역사”, “아직도 과거가 되지 못한 과거”를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 


비메오에서 다큐멘터리 장르를 선택하시고 영화제목, 또는 ‘구자환’을 검색하시면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해원-영문] https://vimeo.com/ondemand/148951 


[레드 툼-한글] https://vimeo.com/ondemand/gjh






Posted by 구자환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해원 예고편 from 구자환 on Vimeo.


영화 <해원>을 오는 510일 전국 극장에서 동시개봉 합니다.

 

<해원>은 해방이후부터 발생한 대한민국 민간인학살의 역사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입니다. 영화는 대구 10월항쟁부터 제주 4.3사건, 여순사건, 한국전쟁기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벌어진 학살을 소개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 왜 죽어야 했는지, 그 주체가 누구인지 드러냅니다.

 

영화소개

-KBS1 : 지역 예술의 힘... 경남독립영화제 관심


-민중의소리 [리뷰]‘대한민국이란 이름에 가린 학살의 역사, 영화 해원


-경남도민일보 "부끄러운 학살의 역사, 다큐로 정확하게 알리고 싶어"


바이오그래피

성 명 : 구 자 환

거 주 지 : 대한민국 경남 창원시

소 속 : ()한국독립영화협회 다큐멘터리 분과 /

직 업 : 기자 / 영화감독

 

[수상경력]

2016 3회 들꽃영화상 다큐멘터리 신인감독상

2013 39회 서울독립영화제 우수작품상

 

필모그래피

2017: 다큐 <해원> - 2017년 서울독립영화제 특별초청

2013: 다큐 <레드 툼>

- 2013 서울 독립영화제 우수작품상

- 2014 무주산골영화제 경쟁부문 후보

- 2014 19회 인디포럼 초청

- 2014 19회 서울인권영화제 초청

- 2014 14회 인디다큐페스티발 초청

2007: 다큐 <회색도시>- 2007년 서울독립영화제 경쟁부분 본선

Posted by 구자환

댓글을 달아 주세요


다큐 영화 <레드툼>은 비메오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유튜브에 올렸던 <레드툼>이 삭제되어서 비메오 영화서비스로 유료전환합니다.

아래는 비메오 링크 주소입니다.

 

영문자막 https://vimeo.com/ondemand/redtomb2

한글자막 https://vimeo.com/ondemand/gjh

 

줄거리 (Synopsis)

 

해방이후부터 53년 휴전을 전후한 기간 동안에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그 속에는 지방좌익과 우익의 보복학살도 자행되었지만, 많은 피해자들은 남한의 군경, 우익단체, 미군의 폭격에 의해 학살을 당했다. 이 가운데 한국전쟁 초기 예비검속 차원에서 구금당하고 학살을 당한 국민보도연맹원이 있다.

 

전국적으로 23~45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고, 정치이념과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이들은 국가가 만든 계몽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전쟁과는 직접적인 상관없이 국가의 이념적 잣대로 인해 재판조차 받지 못하고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이다.

 

국민보도연맹은 해방 후 1948년 이승만 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해 고안해낸 좌익 포섭단체였다. 조직결정의 대외적인 명목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이었고, 조직의 이름도 보호하여 지도한다.”는 뜻인 보도연맹으로 했다.

 

민간단체 성격이었던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각 지역에서 지부가 구성되면서 관변단체로 변하게 된다. 보도연맹원의 구성은 좌익 활동한 사람뿐만 아니라 공산당으로 몰릴만한 여지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국민보도연맹의 가입대상이었다. 그러나 각 지방행정구역 단위당 할당제를 실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에 관계없이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다.

 

보도연맹 학살은 한국전쟁 개전 초기인 19507~8월에 걸쳐 북한군이 점령하지 않은 비전투지역에서 이뤄졌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예비검속자로 몰리게 된다.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모아 놓고 전국 각 지역 계곡에서 무차별 학살하거나 바다에 수장을 시키는 범죄를 저질렀다. 학살 주체는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위대였던 특무대(CIC)와 헌병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경찰과 우익단체가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일관된 명령체계에 의해 자행된 조직적인 학살이었다



Posted by 구자환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난 해 12월 ‘진실과 화해’「Truth and Reconciliation」라는 영문책자 배포를 중단해 논란을 일으킨 보수성향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명예훼손으로 피소됐다.

이 영문책자의 번역, 감수인인 김성수씨 외 2인은 4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낸 손해배상청구소장을 통해 “명확한 번역오류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실화해위원장이 번역오류로 인해 발간 배포를 중단했다”고 주장했다. 또, “각 언론사들을 통해 영문번역 오류로 인한 배포중단이라고 보도가 되면서 허위사실이 유포됐고, 이로 인해 영문 통․번역 업무에 손실을 입힐 정도로 큰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강조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발간한 ‘진실과 화해’「Truth and Reconciliation」영문책자

이들은 영문책자를 발간할 당시, 원고들이 영문번역한 후 원어민 등에게 감수의뢰를 해서  번역의 오류발생여부를 재확인 받은 바 있고, 이영조위원회장이 상임위원직으로 활동할 당시에 영문책자에 대한 검토를 마치고 최종적으로 발간하고 배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영조 위원장이 진실화행위원회 상임위원직을 담당하던 2008년 11월부터 2009년 2월까지 3개월간의 영문원고 검토 기간이 주어졌다며, 당시는 이 위원장이 영어오역에 대해 어떤 지적도 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이밖에 이들은 당시 이영조 상임위원이 올해 초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영문책자의 번역오류를 이유로 들어 배포중단을 지시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 번역상의 오류가 발생되었는지 지적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번역오류를 해명하기 위해 진실화해위원회가 뒤늦게 영문책자 재감수를 의뢰했지만 지금까지 오류가 발생된 부분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고도 했다.

소송인 겸 번역자인 김성수씨는 “자유 민주사회에서는 좌우보혁과 무관하게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번 영문책자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중시되는 자유민주사회의 원칙과 가치와도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또, “진실해야 할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의 영문번역 오류라는 거짓해명을 밝히는 것은 한국의 국격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며, “과거 억울한 사람의 누명을 풀어주고 해결해 주어야 할 진실위 위원장이 오히려 거짓과 허위로서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편, 지난 해 3월 1,000부가 발행된 이 영문책자는 국제기구와 과거사 연구 외국학자, 주한 외국공관, 외신등 주요 기관에 배포됐고, 2009년 11월에 그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1000부가 추가로 제작됐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소개와 조사 절차와 처리, 집단학살 장소발굴과 조사활동, 결정사건 분석, 주요 성과와 향후 과제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영문책자는 한국전쟁 시기 국군의 민간인 학살 장면을 표지로 장식하고 있다.

Posted by 구자환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국전쟁당시 경주시 강동면 안계리의 기계천 일대에서 학살된 민간인들은 미 공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것으로 확인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기인 1950년 8월,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안계리의 기계천 일대에 가해진 미군의 폭격으로 민간인 수십 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이 중 피해 신청인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 35명의 구체적 신원을 확인했다고 25일 밝혔다.

이번 진실규명에 대해서 진실화해위원회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입수한 제18폭격단(18th Fighter Bomber Wing)의 제39폭격편대(39th Fighter Squadron)의『임무보고서(Mission Report)』등의 자료조사와 생존자 및 참고인에 대한 진술조사, 현장조사를 통해 사건의 실재 여부와 희생규모를 조사한 결과를 근거로 했다.  

당시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상황에서 북한군이 낙동강을 경계로 북부, 서부, 동해안으로 동시 다발적으로 침투하고 있는 상황. 

미 공군 제18폭격단 제39폭격편대의 임무보고서(Mission Report)/출처:미국립문서보관소(NARA) /진실화해위원회 제공.

조사결과에 따르면 유엔군은 우세한 공군력을 사용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기계와 안강 부근에서 지연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미 제5공군은 경주지역의 담당 지상군인 미 육군과 한국군을 근접 지원하는 과정에서 형산강 지류인 기계천 일대를 폭격했다. 

미 공군의 폭격은 8월14일께 피난지역인 기계천에 폭격과 기총소사가 이뤄졌으며, 미 공군은 이 지역의 사람들이 피난민임을 인지하고도 공격한 것으로 미공군 문서에 의해 드러났다. 

기계․안강지역에 대한 폭격은 당시 구성된 전술항공통제체계에 의해 전술항공통제센터(Tactical Air Control Center)와 전술항공통제반(Tactical Air Control Party)의 폭격지시와 통제 하에 미 제5공군 제18폭격단 제39폭격편대 소속 공군기(F-51)에 의해 실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신청인들은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과정에서 “사건 발생지역이 당시 전투가 치열했던 기계와 안강의 인근지역이기는 했지만, 폭격 당시에는 피난지역에는 인민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또, “폭격 당일 오전에 정찰기 1대가 와서 피난지역을 2바퀴 정도 둘러보고 갔으며, 점심께에는  은색 전폭기 3~5대가 남쪽에서 날아와 1대씩 번갈아 가며 20분 정도 폭격과 기총소사를 했다”라고 진술했다. 

사건 당시, 경주 안계리 마을 사람들은 북한군이 밀고 내려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폭격 전 가족들과 함께 군인의 눈에 잘 띄는 곳으로 피난을 가야 피해가 없다는 마을어른들의 말에 따라 마을 인근의 기계천으로 피난을 간 것으로 조사됐다. 

희생자들은 가족단위로 희생된 경우가 많았으며, 노인을 비롯해 여성, 어린이 등이 희생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사건 당시 아무런 사전 경고 없이 기계천을 대상으로 폭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의 발생지역이 교전지역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도, 인민군의 위장침투를 의심하여 무리지어 있는 민간인도 폭격 목표물에 포함시킴으로써 희생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군인의 눈에 잘 띄도록 일부러 노출된 장소에 피난해 있었던 다수의 민간인에 대해 사전 경고나 확인 등의 조치나 민간인과 적을 구별할 의무를 무시하고 폭격한 것은 국제인도법 및 당시 미군교범을 위반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집단희생사건 역시 신청인들을 중심으로 조사한 결과로 일가족이 몰살됐거나 유족이 타 지역으로 이주한 경우,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않은 경우까지 포함한다면, 신원이 확인된 35명은 최소한의 희생자 수로 판단되고 있다. 생존자 중 당시 폭격으로 인해 부상을 당한 민간인은 7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에 대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당한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해 미국정부와 협의할 것과 위령사업의 지원, 유족의 심리치료 지원 등을 권고했다.  


Posted by 구자환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lux99.tistory.com BlogIcon 기브코리아 2009.09.25 18: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썩을 넘들

    잘 보고 갑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이하 진실화해위)는 전남 화순지역에서 한국전쟁기 인민군과 지방좌익, 그리고 국군과 경찰에 의해 308명의 민간인이 집단학살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18일 밝혔다.

이번 진실규명결정은 ‘화순지역 빨치산 등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 ‘화순지역 경찰에 의한 민간인희생 사건’,  ‘전남지역(화순․담양․장성․영광) 11사단 사건’이다. 

진실화해위의 조사결과 이들 중 인민군에 의한 희생자는 143명, 그리고 11사단 국군의 의해 103명, 경찰에 의한 희생자는 62명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수치는 사건이 발생한지 60여 년이 지난 뒤,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된 사건에 대한 조사 통해 확인된 최소한의 결과로  일가족이 몰살됐거나 타 지역으로 이주, 진실규명 신청을 하지 않은 경우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순지역을 사례로 조사한 결과, 좌우익세력의 구분 없이 만삭의 임산부를 비롯해 젖먹이 유아와 노인, 장애인 등 지역주민들을 무차별적이고 잔인하게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일가족이 한꺼번에 희생되거나 집 안의 노인과 장애인들이 불에 타 죽는 등 전쟁의 잔혹성도 그대로 나타났다.

진실화해위는 “전남 화순지역은 한국전쟁기에 지역 주민들이 점령세력에 따라 번갈아 희생된 사례는 당시 전국적으로 발생한 현상이었다”며 “좌우대립이 심하지 않았던 화순지역에서도 수많은 민간인 희생이 발생했는데, 이는 전쟁으로 인해 이성을 잃은 잔인한 현실을 보여준 전형적인 사례”라고 했다.

자료사진


지방좌익과 인민군에 의한 학살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에 따르면 화순지역에서는 1950년 7월께 인민군이 점령한 이후, 지방좌익에 의해 1명의 행방불명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인민군 퇴각기인 9월 말에는 광주형무소와 화순내무서에 갇힌 12명의 경찰과 대한청년단원, 공직자 등이 정치보위부원과 자위대원, 인민군에 의해 화순저수지에서 희생됐다.

또한 1950년 10월부터 1952년 4월 사이에는 빨치산과 군경토벌대간의 교전이 벌어지면서 화순 지역주민들은 군경에 협조했다거나, 빨치산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좌우세력에 의해 번갈아 희생되었다. 그 숫자는 295명으로 밝혀지고 있다.

화순지역에서의 빨치산에 의한 희생자들은 1950년 1월 초부터 발생했다. 군경 가족이나 대한청년단원 등 우익인사들이 그 대상이었다. 또 공무원가족이라는 이유로 10살 미만의 어린이와 여성 등 일가족 19명이 살해되었으며, 경찰의 지시로 전선과 전주를 지키던 주민들도 빨치산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다.

자료사진



국군과 경찰에 의한 학살

경찰에 의한 화순지역 희생자는 1950년 10월 중순 경부터 발생했다. 당시 민간인들은 무차별로 총을 쏘며 마을로 진입하는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지서가 피습을 받았다는 이유로 마을 청년 10여 명이 본보기로 사살됐다. 또한 야간에 빨치산에 의해 전주가 잘렸다는 이유로 경비를 맡은 주민을 경찰이 사살하기도 했다.

이 밖에 담양, 장성, 영광지역에서는 1950년 10월 말부터 국군 11사단에 의해 수복작전이 벌어지면서 학살이 일어났다.  이들 지역에서 국군에 의한 희생자는 담양 94명, 장성 67명, 영광․함평에서 27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당시 국군 11사단은 마을에 진입해 가옥에 불을 지르거나, 주민들을 끌어내 부역혐의자 가족과 청장년 등을 사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지휘관의 명령과 사전교육에 따라 작전지역 주민들을 적으로 간주해 사살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또, 부역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인민군복으로 위장한 채 마을에 진주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각 지역의 민간인 희생자들은 가해주체가 인민군이든, 국군이든, 경찰이든 간에 전쟁 참극에 의한 희생자라는 점에서 동일하다며, 국가에 대해서 이들 희생자들을 위한 사과와 더불어 합동으로 위령하도록 하고 참상을 널리 알리도록 권고했다.


Posted by 구자환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2kim.idomin.com BlogIcon 2009.08.19 18: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군'이라고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16일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을 비롯해 ‘순창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과 ‘불갑산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등 모두 5건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고 국가의 공식사과와 위령사업의 지원 및 군인과 경찰을 대상으로 한 평화인권교육 실시 등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가 5건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해 조사한 결과는 참혹했다. 당시 군경과 치안대는 장티푸스를 앓으며 피난하지 못한 민간인을 움막에 넣어 불태워 죽이거나, 희생자들의 귀를 잘라가는 잔혹성을 띠기도 했다. 특히 희생된 민간인들은 적법한 재판도 없이 개인적 감정이나 자의적 판단으로 집단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산청외공리 민간인학살 자료사진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처형”
 

진실화해위원회는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을 조사한 결과,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약 3개월간 당시 충남 서산(現 서산시, 태안군)지역에서 서산․태안경찰서 경찰, 치안대, 해군에 의해 다수의 민간인들이 부역혐의자로 몰려 희생됐다고 발표했다.
 

진실화해위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시 서산경찰서 태안경찰서와 치안대는 1950년 10월 중순부터 12월 사이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부역한 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을 각 읍.면 창고와 경찰서․지서 유치장에 구금한 후 이들 중 ‘처형’으로 분류된 자들을 서산시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해미읍성 동문 밖 방공호, 소원면 신덕리 해안 등지에서 법적 절차 없이 즉결 처형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서산경찰서는 서산읍 부역혐의자들과 서산군 각 면에서 이송된 부역혐의자들을 경찰서 유치장과 읍사무소 창고 등지에 구금해 조사한 후, 처형대상자 300여 명을 서산시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와 수석리 소탐산으로 끌고 가 집단 사살했다.
 

해미면에서는 해미지서 경찰과 치안대가 부역혐의자들을 양조장과 지서 유치장으로 연행해 취조와 고문을 가했으며, 이 가운데 104명을 해미읍성 동문 밖 방공호와 반양리 옻걸이로 끌고 가 집단 사살했다.
 

또 소원면에서는 면치안대로부터 부역혐의자로 추정되는 주민들의 명단을 제공받은 소원지서 경찰이 치안대와 함께 부역혐의자들을 각 마을에서 연행해 면 창고에 구금했으며, 이들 중 192명을 신덕리 해안과 시목리 장재 금광굴, 모항리 만리포에서 사살했다.
 

진실화해위는 이외에도 지곡면, 이북면, 고남면 등 서산지역 20개 읍․면에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처형대상자로 분류된 부역혐의자들이 집단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고, 1950년 10월 8일 해군은 근흥면 정죽리 안흥항에 상륙 중 교전이 발생하자 발포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인근 주민 수십 명을 연행해 조사한 뒤, 이들을 안흥항 인근 바위(現 수협창고)에서 사살했다고 밝혔다.
 

민간인 희생자들은 명확한 처리기준 없이 경찰과 치안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처형대상자로 분류된 것으로도 밝혀졌다. 
 

당시 서산경찰서 사찰계에서 근무한 경찰 역시 “부역혐의자를 처형하는 과정에서 감정적 요소가 많이 개입됐다”고 진술했으며, 팔봉지서 경찰도 “무고하게 처형된 민간인들이 많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산지역에서 부역혐의로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려갔던 20~40대의 성인 남성들로 여성과 청소년도 일부 포함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희생자 중에는 이웃의 권유나 강요에 의해 인민군점령기에 특정한 직책을 맡거나 자신도 모르게 특정 단체에 이름이 올랐던 다수의 사람들도 포함돼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경찰과 치안대, 해군이 적법한 절차 없이 적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의심만으로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국민의 생명을 침해한 불법적인 사건”이라고 밝혔다.
 

서산.태안지역의 민간인 희생자는 추정자 888명을 포함해 총 1,865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진실화해위는,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사건 이후 멸족된 사례 등을 고려하면 이는 최소한의 희생자 수라고 덧붙였다.
 

함양 민간인 희생사건,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로 만들고 총살”
 

진실화해위원회는 ‘함양 민간인 희생 사건’을 조사한 결과,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함양 지역 민간인 86명이 빨치산과 협조․내통하였다는 이유로 국군 제3연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의용전투특공대)에 의해 집단희생 되었다고 발표했다. 
 

1960년 함양『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서류철』

진실화해위원회는 1948년 말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 반란군들이 지리산 자락에서 빨치산 활동을 본격화하자, 당시 지리산지구에서 빨치산토벌작전을 수행하던 국군 제3연대 제3대대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는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함양군 일대와 지리산 등에서 빨치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산간마을을 소개(疏開)하기도 했다고도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함양경찰서는 국군과 함께 반란군을 토벌하며 빨치산과 내통하는 혐의나 식량 보급처로 이용되는 마을 주민을 연행했으며 함양경찰서장의 명령으로 민간인들로 구성된 특공대는 지서의 지휘에 따라 경찰과 국군을 보조하며 마을 동향을 파악하고 민간인들을 연행하기도 했다.
 

또 국군과 경찰, 특공대는 함양읍 등 7개 지역 주민들을 빨치산과 내통․협조하였다는 혐의로 군부대, 함양경찰서, 각 지서 등지로 연행하여 고문과 취조를 한 후 함양읍 이은리에 있는 당그래산과 안의면 공동묘지 등지에서 살해했다.
 

함양군 수동면에서는 1949년 9월 18일 도북리 주민 35명에 이어, 다음날 죽산리 주민 18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지서와 함양경찰서를 거쳐 함양읍에 주둔한 군인들의 취조를 당한 후 도북리 주민 32명은 9월 20일에, 죽산리 주민 17명은 다음 날 군인들에 의해 당그래산에서 집단 사살됐다.
 

안의면 주민들은 1949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군경에 의해 연행돼 당그래산에서 사살됐으며 서하면, 백전면, 휴천면, 지곡면 주민들도 경찰에 의해 연행돼 사살되거나 행방불명됐다. 당시 안의면 특공대로 활동했던 아무개씨는 “잡아온 사람들을 경찰들이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로 만들고 나서 총살시켰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희생자들은 무장한 빨치산들이 마을에 출현하여 식량 등을 요구하였을 때 강압적인 분위기와 협박에 못 이겨 협력할 수밖에 없는 보통의 주민들로 대부분 농사를 짓던 20~40대 남성들이었다”고 밝히고, 이 사건의 가해 주체는 국군 제5사단 제3연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로 확인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은 군경이 빨치산 토벌작전이라는 명분 하에 비무장․무저항의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여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살해한 것은 반인도주의적이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이 밖에 △순창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불갑산지역 민간인희생사건 △담양․장성지역 경찰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등 3건에 대해서도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국가의 공식사과를 권고했다. 

 # 관련기사 : 좌우익으로 나뉜 행방의 기쁨,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 관련기사 : 지리산 자락에서 전하는 58년전 민간인학살

Posted by 구자환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ㅎㅎ 2009.01.19 07: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한민국 경찰놈들이 그렇죠 뭐... 어청수를 보세요 지금도 그렇잖아요? 촛불 하나 들었다고 민주시민을 불법폭도로 몰아부치고 깨부수고 유모차 애기들한테도 분말 소화기를 발사하는 놈입니다.

  2. Favicon of http://blog.daum.net/osaekri BlogIcon 한사의 문화마을 2009.01.19 08: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은 아닐까요?
    이미 부역자 타령을 하고 빨갱이 타령을 하는 조중동에 세뇌된 수구들이 득세를 하고 있는데요?
    그들이 애국자인양 설치는 이 세상이 과연 온전한 세상인가요?

  3. 노씨 2009.01.19 14: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무현 장인에 의해서 우리 양민 11명 죽었다카데...

    좌파 빨갱이 새끼들에 억울하게 죽은 우리 양민이 훨씬 많다

    빨갱이에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 나도 많이 보았다

  4. 뻘갱이 2009.01.19 14:2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성이와 그의 똘마이 빨갱이 새끼들에게 우리 양민 참말로 많이 돌아가셨다

    빨갱이 새끼들에게 억울하게 죽은 그들의 한은 누가 달래 주노?

    이 같은 빨갱이 새끼들아... 나는 통곡한다 이 빨갱이 새끼들아

  5. 아오지 2009.01.19 14: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정구-이재정-노무현-김대중-박지원 --- 북한으로 가거라 꺼져 버려라

    가서 정일이와 아오지 탄광에나 가거라

  6. Favicon of http://blog.daum.net/gabinne/12376075 BlogIcon 林馬 2009.02.23 11: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말로 쪼잔한 사람입니다.
    의회 시정질문에 열받아 보복인사를 한다는 것이 시장으로서
    할 일인가요.
    의회도 당신의 발밑창 만큼도 생각하지않다는 증거지요.

  7. Favicon of http://ssbk1094@daum.net BlogIcon 김성섭 2009.02.26 15: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족의 비극적 전시 당시에 범죄 혐의에 대한 법적 판단이나 절차없이 목숨을 빼앗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고 재발되어서는 않된다. 그러나 60여년전의 사건에 대해 군인,경찰에 평화인권교육을 시키라니? [진실화해위]에서 다루는 사건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할때 마다 이사람들은 화성에 사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전시 상황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미화하고 당연한 것으로 치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판단의 기준은 나타난 결과 못지 않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여건 등을 종합판단해서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행정부의 기능도 미약하게 작동하고 있던 당시에 면,리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사건까지 법적절차와 재판등 민주적 절차를 들먹인다는 것은 결국 내얼굴에 침뱃는 격이다. 또 군경이나 특공대,치안대 같은 소위 우파단체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등은 거침없이 국가의 사과와 배상을 권고하면서 공산군이나 리,당인민위원회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가? 참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다. 역사적 사실은 결국 후세의 사가들에 의해 공정하게 결론지어질 것으로 기대하지만 혹 거기에 앞서 이런 판결이나 섣부른 결론이 이들의 판단에 그릇된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일제강점기, 박호철(가명, 34년생. 함양군 수동면)옹은 중학교 3학년 시절에 해방을 맞았다. 그가 살던 상백리 마을도 해방으로 들뜬 분위기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좌익과 우익의 이념분쟁에 휘말렸다.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마을 도로에 늘어선 버드나무는 삐라가 수없이 나붙어 하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삐라를 붙인 사람들은 지주들이거나 많이 배운 소위 지식인이라고 전했다. 삐라는 ‘농토는 농민에게 주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날이 밝은 후 경찰들은 마을로 찾아와 삐라를 떼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을 닦달했다고 한다.
 

해방을 맞이하던 1945년 그는 소작농으로 살고 있었다. 소작농을 하려면 지주에게 선물을 해야 했다. 명절이면 자신들도 먹어보지 못한 쇠고기를 사서 주어야만 소작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소작농은 지주에게 논 한마지기 당 한 섬의 쌀을 지주에게 주어야만 했다. 당시에는 논 한마지기에서는 두 섬 가까운 쌀이 생산됐다. 소작농은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지대로 지주에게 주어야 했다.
 

그러다가 1948년 이승만 정권시절, 조봉암 농림부장관이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조봉암은 이후 진보당 당수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1958년 이승만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사형을 당한 인물이다. 토지개혁은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이 원 지주에게 5년 동안 땅값을 상환하는 유상몰수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정부는 그 증서를 농민에게 주었다 한다. 토지개혁이 실시되면서 곡황(곡식창고)에 쌀을 채워놓고 살던 지주들은 화병에 죽기도 했다. 상백리 마을의 지주 김아무개씨도 그렇게 죽었다.
 

함양군 상백마을

 
상백리 마을에는 이아무개라는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 한문공부를 많이 해서 마을에서는 천재라고 불리던 그는 친구들과 마을사람에게 좌익사상을 가르쳤다. “없는 사람들을 잘 살게 해준다”는 그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했고, 지주들에게 생계를 의지해야 할 만큼 살림살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어느날 관에서 데리고 간 후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가 잠들었을 때 누군가가 와서 잡아 갔다. 그의 부모는 이 사실을 알고도 하소연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친구였던 박호철 옹은 “좌익에 포섭된 사람들은 이 아무개처럼 다 사라졌다”고 했다. 
 

1949년, 마을에는 우익단체인 한청(대한청년단)이 조직되었다. 각 부락별로 조직된 한청은 죽창을 들고 공비(여순사건으로 빨치산 활동을 하던 여순국방경비대)들이 마을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경비를 서고 있었다.

어느 날 공비가 마을로 내려와 정동석이란 사람의 집을 알려달라고 총으로 위협을 했다. 보초를 서던 이아무개는 협박에 못 이겨 정동석의 집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 이후로 그는 정동석에게 ‘죽을 만큼’ 맞았다. 박호철 옹은 “죽창으로 총을 당하지 못한 한청이 빨치산에게 마을의 지리를 가르쳐주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박호철 옹의 외가 사촌형은 빨치산에게 곡식을 운반해 주다가 도중에 탈출을 했다. 그 일로 인해 사촌형은 수동지서에 잡혀왔다. 당시 구장이라는 사람도 함께 잡혔다. 두 사람은 부역혐의로 안희면 하월리 하원에서 자신들의 무덤이 될 구덩이 앞에 서게 됐다. 이 사실을 안 박호철 옹의 모친은 소 한마리 값을 지서에 전해주고 사촌형을 구해냈다. 그러나 돈이 없었던 구장은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했다. 그 시절에는 돈이 있는 사람들은 경찰에게 쌀이나 돈을 주고 살아나올 수도 있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사촌형은 경찰에게 당한 고문과 구타로 피를 토했고, 평생을 반신불구로 살았다. 
 

집단 학살지인 당그레산.

이후 마을 사람들은 국민보도연맹 가입으로 죽을 위험에 처했다. 일자무식인 어른들은 도장을 모두 구장에게 맡겨놓았는데, 구장은 마을사람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도장을 찍어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줄도 몰랐던 그의 선친을 비롯한 동네사람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보도연맹을 죽인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피난할 만한 곳이 없어 도망을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행히 주민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낫다. “생각보다 빨리 인민군이 남하 하면서 주민들은 학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17세, 인민군이 마을로 오기 전에 국군과 구장은 “빨갱이가 와서 모두 잡아 간다”며 마을 사람들에게 피신을 가라고 했다. 마을사람들은 쌀과 냄비를 챙겨서 4km 떨어진 산골 부락으로 피난을 갔다. 


어른을 따라 피난 갔던 박호철 옹은 가축을 돌보기 위해 집에 남은 부친에게 밥을 해주려고 마을(수동면)으로 내려갔다. 마을 서낭제에는 피난을 가지 못한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 날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국군은 훈련 중이라고 했다. 저녁이 되면서 점차 총소리는 가까워졌다.
 
미군과 국군은 인민군이 북쪽인 서상면에서 안희면 방향으로 올 것으로 알고 대비를 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그 반대 방향에서 들어왔다. 전라도 지역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인민군에게 국군과 미군은 포위가 되었다. 
 

전투가 벌어지면서 마을에서는 민간인 사상자도 생겨났다. 저녁 무렵 부자였던 김아무개 뒷집에 폭탄이 떨어지면서 그의 친구의 모친과 김 아무개가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부자였던 김 아무개의 ‘정지가시내’(식모)로 살고 있던 분순이도 그날 죽었다. 그는 담을 넘다가 마침 떨어진 폭탄에 죽었다. 
 

그는 총탄을 피해 아버지와 논 가운데 파논 호(참호)에 몸을 숨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빨간줄이 아래로 내려진 바지를 입은 군인이 나타났다. 빨간 줄이 있는 바지를 입은 군인은 인민군 전투부대였다. 호에서 나오라고 지시를 한 군인은 손을 펴보라고 했다. 손을 펴 보이자 군인은 “호 속에서 나오지 말고 꼼짝 말고 있어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마을을 점령한 인민군은 동네사람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당신들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왔다”며 “피난 간 주민들을 데려오라”고 했다. 산속 마을로 피난 간 사람들은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마을에 주둔한 인민군들은 “주민들에게 쌀을 주며 밥을 해 달라”고 했다. 박호철 옹은 “보리밥만 먹던 주민들은 그때 쌀밥을 맛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인민군 속에는 17살 난 병사가 있었다. 그는 동갑내기인 인민군과 아랫방에서 같이 자고 친구처럼 들에서 놀기도 했다. 
 

인민군(정규군)은 마을을 점령하고 난 후 짐승이나 여성에게 ‘해꼬짓’을 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정치공작대가 마을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가르쳤다. 그는 노래의 일부인 “아아...혁명은 다가왔다” 정도만 기억했다. 이때쯤 인민군은 마을의 토지를 주민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하지만 서울수복이 되면서 주민들은 토지를 다시 내어 놓아야 했다. 
 

또, 인민군 면당에서는 동네마다 의용군 수를 할당했다. 상백리에는 서너명의 젊은 사람들이 의용군으로 차출되어 갔다. 하지만 의용군으로 간 마을 주민들은 도망을 와 다시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마을에는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젊은 사람들은 특공대로 가고, 토벌대로 모두 갔다. 이때는 빨치산 이현상 부대가 인근의 용추골짜기에 주둔하고 있었다. 1956년, 함양군에 있던 빨치산이 사라졌다. 주민들은 그 이후 돌아와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함양군 수동면에 위치한 공동묘지. 민간인 15여명이 학살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박호철 옹은 알려지지 않은 학살 장소를 기억하고 있다. 그의 당시 자신의 나이 17. 18세로 기억하고 있으나 한국전쟁 전,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지서에서 빨치산의 공격을 대비해 담을 쌓는 부역을 하고 있다가 트럭 한 대에 실려 온 청년들을 보았다. 
 

“하얀 테이프로 눈을 가린 청년들은 수동면 지서 뒤편 연화산 방향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모두 총살을 당하고 구덩이에 묻혔다”. 그는 그 시기를 빨치산에서 자수한 사람들로 구성된 부대인 ‘사찰유격대’가 활동하고 있던 시기라고 기억했다. 

Posted by 구자환

댓글을 달아 주세요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