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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좌우익으로 나뉜 해방의 기쁨,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일제강점기, 박호철(가명, 34년생. 함양군 수동면)옹은 중학교 3학년 시절에 해방을 맞았다. 그가 살던 상백리 마을도 해방으로 들뜬 분위기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좌익과 우익의 이념분쟁에 휘말렸다.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마을 도로에 늘어선 버드나무는 삐라가 수없이 나붙어 하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삐라를 붙인 사람들은 지주들이거나 많이 배운 소위 지식인이라고 전했다. 삐라는 ‘농토는 농민에게 주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날이 밝은 후 경찰들은 마을로 찾아와 삐라를 떼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을 닦달했다고 한다.
 

해방을 맞이하던 1945년 그는 소작농으로 살고 있었다. 소작농을 하려면 지주에게 선물을 해야 했다. 명절이면 자신들도 먹어보지 못한 쇠고기를 사서 주어야만 소작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소작농은 지주에게 논 한마지기 당 한 섬의 쌀을 지주에게 주어야만 했다. 당시에는 논 한마지기에서는 두 섬 가까운 쌀이 생산됐다. 소작농은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지대로 지주에게 주어야 했다.
 

그러다가 1948년 이승만 정권시절, 조봉암 농림부장관이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조봉암은 이후 진보당 당수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1958년 이승만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사형을 당한 인물이다. 토지개혁은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이 원 지주에게 5년 동안 땅값을 상환하는 유상몰수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정부는 그 증서를 농민에게 주었다 한다. 토지개혁이 실시되면서 곡황(곡식창고)에 쌀을 채워놓고 살던 지주들은 화병에 죽기도 했다. 상백리 마을의 지주 김아무개씨도 그렇게 죽었다.
 

함양군 상백마을

 
상백리 마을에는 이아무개라는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 한문공부를 많이 해서 마을에서는 천재라고 불리던 그는 친구들과 마을사람에게 좌익사상을 가르쳤다. “없는 사람들을 잘 살게 해준다”는 그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했고, 지주들에게 생계를 의지해야 할 만큼 살림살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어느날 관에서 데리고 간 후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가 잠들었을 때 누군가가 와서 잡아 갔다. 그의 부모는 이 사실을 알고도 하소연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친구였던 박호철 옹은 “좌익에 포섭된 사람들은 이 아무개처럼 다 사라졌다”고 했다. 
 

1949년, 마을에는 우익단체인 한청(대한청년단)이 조직되었다. 각 부락별로 조직된 한청은 죽창을 들고 공비(여순사건으로 빨치산 활동을 하던 여순국방경비대)들이 마을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경비를 서고 있었다.

어느 날 공비가 마을로 내려와 정동석이란 사람의 집을 알려달라고 총으로 위협을 했다. 보초를 서던 이아무개는 협박에 못 이겨 정동석의 집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 이후로 그는 정동석에게 ‘죽을 만큼’ 맞았다. 박호철 옹은 “죽창으로 총을 당하지 못한 한청이 빨치산에게 마을의 지리를 가르쳐주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박호철 옹의 외가 사촌형은 빨치산에게 곡식을 운반해 주다가 도중에 탈출을 했다. 그 일로 인해 사촌형은 수동지서에 잡혀왔다. 당시 구장이라는 사람도 함께 잡혔다. 두 사람은 부역혐의로 안희면 하월리 하원에서 자신들의 무덤이 될 구덩이 앞에 서게 됐다. 이 사실을 안 박호철 옹의 모친은 소 한마리 값을 지서에 전해주고 사촌형을 구해냈다. 그러나 돈이 없었던 구장은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했다. 그 시절에는 돈이 있는 사람들은 경찰에게 쌀이나 돈을 주고 살아나올 수도 있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사촌형은 경찰에게 당한 고문과 구타로 피를 토했고, 평생을 반신불구로 살았다. 
 

집단 학살지인 당그레산.

이후 마을 사람들은 국민보도연맹 가입으로 죽을 위험에 처했다. 일자무식인 어른들은 도장을 모두 구장에게 맡겨놓았는데, 구장은 마을사람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도장을 찍어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줄도 몰랐던 그의 선친을 비롯한 동네사람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보도연맹을 죽인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피난할 만한 곳이 없어 도망을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행히 주민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낫다. “생각보다 빨리 인민군이 남하 하면서 주민들은 학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17세, 인민군이 마을로 오기 전에 국군과 구장은 “빨갱이가 와서 모두 잡아 간다”며 마을 사람들에게 피신을 가라고 했다. 마을사람들은 쌀과 냄비를 챙겨서 4km 떨어진 산골 부락으로 피난을 갔다. 


어른을 따라 피난 갔던 박호철 옹은 가축을 돌보기 위해 집에 남은 부친에게 밥을 해주려고 마을(수동면)으로 내려갔다. 마을 서낭제에는 피난을 가지 못한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 날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국군은 훈련 중이라고 했다. 저녁이 되면서 점차 총소리는 가까워졌다.
 
미군과 국군은 인민군이 북쪽인 서상면에서 안희면 방향으로 올 것으로 알고 대비를 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그 반대 방향에서 들어왔다. 전라도 지역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인민군에게 국군과 미군은 포위가 되었다. 
 

전투가 벌어지면서 마을에서는 민간인 사상자도 생겨났다. 저녁 무렵 부자였던 김아무개 뒷집에 폭탄이 떨어지면서 그의 친구의 모친과 김 아무개가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부자였던 김 아무개의 ‘정지가시내’(식모)로 살고 있던 분순이도 그날 죽었다. 그는 담을 넘다가 마침 떨어진 폭탄에 죽었다. 
 

그는 총탄을 피해 아버지와 논 가운데 파논 호(참호)에 몸을 숨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빨간줄이 아래로 내려진 바지를 입은 군인이 나타났다. 빨간 줄이 있는 바지를 입은 군인은 인민군 전투부대였다. 호에서 나오라고 지시를 한 군인은 손을 펴보라고 했다. 손을 펴 보이자 군인은 “호 속에서 나오지 말고 꼼짝 말고 있어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마을을 점령한 인민군은 동네사람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당신들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왔다”며 “피난 간 주민들을 데려오라”고 했다. 산속 마을로 피난 간 사람들은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마을에 주둔한 인민군들은 “주민들에게 쌀을 주며 밥을 해 달라”고 했다. 박호철 옹은 “보리밥만 먹던 주민들은 그때 쌀밥을 맛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인민군 속에는 17살 난 병사가 있었다. 그는 동갑내기인 인민군과 아랫방에서 같이 자고 친구처럼 들에서 놀기도 했다. 
 

인민군(정규군)은 마을을 점령하고 난 후 짐승이나 여성에게 ‘해꼬짓’을 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정치공작대가 마을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가르쳤다. 그는 노래의 일부인 “아아...혁명은 다가왔다” 정도만 기억했다. 이때쯤 인민군은 마을의 토지를 주민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하지만 서울수복이 되면서 주민들은 토지를 다시 내어 놓아야 했다. 
 

또, 인민군 면당에서는 동네마다 의용군 수를 할당했다. 상백리에는 서너명의 젊은 사람들이 의용군으로 차출되어 갔다. 하지만 의용군으로 간 마을 주민들은 도망을 와 다시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마을에는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젊은 사람들은 특공대로 가고, 토벌대로 모두 갔다. 이때는 빨치산 이현상 부대가 인근의 용추골짜기에 주둔하고 있었다. 1956년, 함양군에 있던 빨치산이 사라졌다. 주민들은 그 이후 돌아와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함양군 수동면에 위치한 공동묘지. 민간인 15여명이 학살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박호철 옹은 알려지지 않은 학살 장소를 기억하고 있다. 그의 당시 자신의 나이 17. 18세로 기억하고 있으나 한국전쟁 전,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지서에서 빨치산의 공격을 대비해 담을 쌓는 부역을 하고 있다가 트럭 한 대에 실려 온 청년들을 보았다. 
 

“하얀 테이프로 눈을 가린 청년들은 수동면 지서 뒤편 연화산 방향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모두 총살을 당하고 구덩이에 묻혔다”. 그는 그 시기를 빨치산에서 자수한 사람들로 구성된 부대인 ‘사찰유격대’가 활동하고 있던 시기라고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