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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50년만의 해원, 김주열열사 범국민장

김주열열사 영정을 앞세운 운구 행렬이 행진을 시작하고 있다.

김주열 열사의 유족들이 헌화 후 묵념하고 있다.



 “원통하게 죽었고나. 억울하게 죽었고나. 잊지 못할 3.15는 그 누가 만들었나. 마산시민 흥분되어 총칼 앞에 싸울 때에 학도겨레 장하도다. 잊지 못할 김주열. 무궁화 꽃을 안고 남원 땅에 잠 들었네”

 

1960년 4월11일 마산 중앙 앞바다에 참혹한 시신으로 또 올랐던 그날의 현장에서 당시 치루지 못했던 김주열 열사의 장례식이 50년 만에 범국민장으로 열렸다. 김주열열사는 당시 주검이 되어 이곳 중앙부두에서 떠올랐지만, 당시 경찰들은 유족들의 강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신을 선산에 강제 매장했다.

 

그로부터 50년. 김주열열사의 주검이 떠올랐던 마산중앙부두는 변함없는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 그곳에는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지 않는 관청의 홀대에 울분했던 한 시민단체가 세운 표지판이 열사의 시신이 떠오른 장소를 알리고 있다. 표지판은 ‘민주혁명의 햇불로 부활한 김주열 열사’라고 적고 있다.

 

그 앞 공터로는 열사의 모교인 남원 금지중학교 학생들과 마산 용마고(구 마산상고) 학생들, 그리고 열사의 뜻을 기리고자 모인 이들로 메워졌다. 무대 옆에는 김주열 열사의 넋을 모실 하얀 꽃상여가 청아한 모습으로 놓여 있다.

 

지리산 가수로 알려진 고명숙씨의 ‘남원 땅에 잠들었네’라는 열사의 추모곡이 애절하게 울려 퍼지면서 문화제는 시작됐다.

 

이 자리에는 열사의 누나 김경자씨를 비롯해 유족 18명이 자리했다. 유족들은 추모곡의 애절한 음률이 울려 퍼지자 끝내 눈물을 보였다. 당시 경찰로부터 열사의 주검을 빼앗겨 강제로 매장당한 후 50년의 세월, 유족들이 마산에서 열리는 공식적인 행사에 초대받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열사가 떠오른 중앙부두 바다를 바라보며 50년 전의 시간을 회상하던 김경자씨는 “열사가 떠나기 바로 전날 밤을 함께하며 보냈다.”고 했다. 그런 만큼 그의 눈에는 지금까지도 열사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는 “50년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열사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며 “마산에서 열사를 잊지 않고 장례를 치러주어서 고맙다”는 말만 무수기로 반복했다. 당시 경찰서장이 열사의 시신을 땅에 묻지 않고 수장한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는 말이 공명이 되어 울린다.

 

시신 인양지인 마산 중앙부두에서 50년만에 열리는 김주열열사 장례식.

김주열 열사의 넋을 부르는 진혼무



추모식은 못 다한 민주화와 보수화된 인사들에 대한 규탄의 장이 됐다. 마산 3.15의거가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지만 경남도지사도 마산시사도 참석하지 않았고 그 흔하던 대독도 없었다. 더욱이 열사의 장례조차도 숱한 방해로 힘들게 진행됐다는 것이 장례위원회의 분개다.

 

김영만 김주열열사 범국민장장례위원장은 “지금도 마산 거리에는 3.15가 국가기념일이 됐다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다”며 “열사의 장례식에 단체장이 참석하지 않은 채 3.15의거 국가기념을 자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목소릴 높였다.

 

백남해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마산대표는 “범국민장을 이행하는 데는 많은 방해가 있었다”며 “3.15 의거가 부패한 권력이 부정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권력에 대한 항거였지만 바로 이 시간까지도 권력집단과 지역 토호들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벽이 이 행사를 막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부패한 권력에 항거한 김주열 열사의 정신만을 의지 삼아 행사를 준비했다.”며 “3월15일 이름을 밝히지 않은 많은 시민들이 행사를 도와주었다.”고 덧붙였다.

 

박영철 김주열추모사업회 남원대표는 “열사는 몸에 묻은 퍼런 이끼조차 씻어내지 못하고 염습은 생각지도 않은 채, 고향 남원인 우비산 자락에 묻혔다”며 “오늘 이 자리는 시민과 도민, 전 국민의 성원으로 반세기 50년의 통한이 해원으로 바뀌는 날”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열사의 시신이 묻혀있는 남원의 우비산 기슭으로 열사의 얼과 넋을 잘 모시고 가 잘 받들어 모시겠다”고 덧붙였다.

 

진달래꽃으로 둘러싸인 열사의 주검이 떠오른 바다를 표현한 무대에는 열사의 넋을 부르는 초혼무가 무용수들의 춤사위로 울려 퍼지며 1부 추모식 문화행사는 끝이 났다.

 

범국민장에 참석한 이들이 김주열 열사와 168위의 영정앞에 헌화 묵념하고 있다.


2부 순서인 범국민장은 열사에 대한 묵념과 약력 소개로 시작됐다. 범국민장 무대도 당시 순국영령 168위의 영정으로 꾸려졌다. 장례위원회는 범국민장을 통해서 김주열 열사의 장례뿐만 아니라 순국영령들의 넋도 함께 기리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이어진 조사들은 열사와 영령들의 민주화를 위한 뜻을 다시금 가슴에 새기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함세웅 민주화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오늘 범국민장은 김주열 청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고귀한 정신에 대한 장엄한 고백이며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한 다짐의 장”이라고 했다. 또, “김주열의 희생으로 이룩한 4.19 혁명은 5.16군사반란을 통해 짓밟혔다”며 “열사의 희생과 3.15 의거, 그리고 4.19혁명은 5.16군사반란과 그 잔재세력을 청산할 때 비로소 그 참된 정신을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박중기 민족민주열사추모연대 상임의장은 “열사의 숭고한 뜻이 아직 펼쳐지지 않아 50년 지난 지금에 장례식을 치루게 된 것”이라며 “김주열 열사의 장례식을 치루는 것은 그때 열사를 지키지 못한 마산시민들의 죄책감과 산자들의 열사에 대한 합당한 예우”라고 말했다.

 

시인이자 남원 금지중학교 교사인 복효근씨의 ‘주열이는 살아 있다’ 시 낭송에 이어 한국진보연대 이강실 상임대표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이강실 상임대표는 “김주열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4.19혁명을 6.2선거혁명으로 이어가야 한다”고 했다. 경남불교평화연대 고문인 월봉스님은 “열사들이 극락왕생해 이 나라와 민주성지 마산을 지켜 달라”고 기원했다.

 

마산 용마고등학교 학생대표의 추모편지 낭송에 이어 유족들이 무대에 올라 인사를 했다.

 

열사의 누나인 김경자씨는 “세월이 가니 슬픈 일도 기쁘게 맞이할 날이 있다”며 “어려운 여건에서 초대해 주신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범국민장을 마친 열사의 꽃상여가 50년 전, 격렬했던 현장으로 향하고 있다. 열사의 넋을 담은 운구는 모교인 마산용마고등학교에서의 노제를 끝으로 남원으로 향했다.


헌화에 이어 발인이 시작됐다. 열사의 영정을 앞세운 운구행렬은 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이 꽃상여를 매고 장송가를 부르며 행진을 시작했다.

 

운구 행렬은 3.15탑과 남성동파출소를 거쳐 3km 떨어진 열사의 모교인 마산 용마고등학교로 향했다. 운구 앞에는 민주열사들을 기리는 만장을 마산 용마고등학교 학생들이 들었고, 168위의 영정사진을 새긴 만장은 남원 금지중 학생들이 들었다. 그 뒤로는 장례식에 참석한 시민들이 길게 따르며 열사의 넋을 위로 했다.

 

이날 3.15 기념탑과 용마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노제를 지낸 열사의 운구는 그 넋을 담아 50년 만의 해원(解冤)으로 유족과 함께 고향인 남원으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