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취재를 갈 때 흔히 놀러 간다는 표현을 자주 합니다. 일이 곧 놀이가 아니고서는 고단한 생활을 감내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배우러 간다고도 합니다. 내가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한 사실들을 들려주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들을 알려내는 것이 제 직업이기도 합니다.
토요일(19일)은 추석 남북 이산가족 상봉자로 선정된 박양실 할머니(97세.부산진구)를 인터뷰하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이미 타 매체에서 보도가 많이 나간지라 ‘건질 것’을 걱정했지만, 박 할머니와 그의 아들인 이대원(64세)를 뵙고는 취재 이전에 오히려 많은 것을 생각하고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박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4 후퇴 때 4남매와 피난을 떠났습니다. 당시 북측에 남겨진 이는 그의 3살박이 딸(리언화. 62세)와 할머니였습니다. 두 사람은 거동이 어려워 함께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당시 나이 5살인 이대원씨는 잠을 자다 무작정 어머니를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할머니의 남편은 1.4 후퇴를 앞두고 북한에서 사망을 했습니다.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 한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거죠.
58년 만에 만나는 핏줄이라 두 분은 딸과 동생인 리언화씨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낯설기만 합니다. 그러나 핏줄인 만큼 얼굴 윤곽은 자신들과 닮았을 거라고 합니다.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핏줄을 반세기가 훨씬 지나서 만나는 만큼 말로서는 그 감정을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분은 남과 북을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북측을 원망하는 마음이 강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남과북의 하나 됨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습니다.
박 할머니는 남과북이 속을 확 트여놓으면 되는데 그렇지 않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내 민족인데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 민족끼리 서로 사랑을 못 가져서 아직 통일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한탄해 하십니다.
그의 아들인 이대원씨는 예전에 외국으로 나갔다가 들은 말을 전해 줍니다. 한 외국인이 우리가 세계화, 경제대국을 말하고 있지만, 자기 나라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세계화로 나선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는냐는 투의 지적을 하더랍니다.
그는 통일은 국가 이익추구에도 아주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좁은 땅으로는 인구문제, 집문제 등으로 한계가 생길 것이라며 그 이유만으로도 남북이 하나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문제를 대비해서라도 또, 앞으로 젊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남북한의 문제는 한민족으로 서 서로 공존 번영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층들의 통일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도 깊은 우려를 나타내더군요.
들으면서 남북의 정부당국이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경상도의 대통령, 전라도의 대통령이 아닌 한반도 전체를 통으로 아우를 수 있는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빠로서 58년 동안 아플 때 돌아봐 준 것도 없고, 제사 때 가본 적도 없어 동생에게 ‘내가 너 오빠다’ 라고 나설 자신이 없다는 이대원씨의 표정. ‘남과 북은 똑 같은 내 민족이고 내 동족인데 가릴 것 없이 사랑으로 만났으면 좋겠다’는 박양실 할머니의 힘센 말이 여전히 귀에 남아 맴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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