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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쌍용차 사태는 인간성 상실만 남겼다

쌍용차 평택공장을 점거하고 있는 노조원이 6일 3시께 농성을 풀겠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참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는 안도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소위 죽은 자로 분류됐던 그들이 도장 공장 점거농성을 풀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힘의 논리에 밀린 약자의 굴복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반대편에 선 이들은 승리감에 젖어 있을 터다. 반면 점거 농성자들은 처음부터 요구해 오던 총고용 보장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쌍용차 사태를 두고 정부와 사측, 그리고 노동자들의 시각은 각자의 입장은 만큼 다양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책적 해결방법이나 사태의 원인을 두고 벌이는 공방보다도 더 절망스러운 것은 쌍용차사태에서 나타난 인간의 추악함이다. 
 


‘전쟁터와 같다’는 쌍용차 평택공장에서 전해오는 소식을 접하면서 내내 우울할 수밖에 없었다.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고 피해가 가장 많이 속출한 5일 하루는 더 그랬다. 
 

그 날 ‘함께 살자’는 ‘죽은 자’들의 목소리는 공권력이란 미명으로 자행된 경찰특공대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소위 ‘산 자’들은 그들만의 파시즘으로 법을 조롱하며 기자나 가족대책위 할 것 없이 도움이 안되는 모든 이에게는 무차별 폭력과 폭행을 휘둘렀다. 게다가 용역들은 약자들을 짓밟는 보상으로 주어지는 풍족한 삶을 선택했다.
 

그들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는 당연했을 것이다. 그래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 모두의 입장에서 이해를 해보려 한 들, 인간의 잔혹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동정을 둘 수가 없다. 
 

노사간의 관계라며 회피하던 정부가 공권력이란 힘으로 개입을 시작했다. 쌍용차를 매각한 후 따르는 책임에는 입 닫고 있다가 형색이 궁해지니까 나오는 모양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사용하는 경찰은 저항을 포기한 노동자를 집단으로 짓밟고 주먹을 날렸다. 여기에 더해 일부는 ‘깡패’의 모습을 보여줬다. 쓰러진 노동자를 지나치며 방패와 지팡이로 무참히 머리를 치는 장면에서다. 그 장면에는 인간의 잔혹함이 스며있다.
 

국민은 그들에게 무한한 권력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필요이상의 권력을 사용해 국민에게 폭행을 가했다. 그들도 가정으로 돌아가면 한 가정의 다정스런 남편이자 아버지일 것이다. 최소한 사회는 그런 모습을 인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의 경찰은 그 모습을 거부했다. 살기 위해 외치는 약자를 대상으로 필요이상의 강압과 폭력으로 화풀이를 해 댄 것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서는 그들이 정말 이 나라 경찰인지 의문스럽다.
 

사측에 의해 구사대로 돌변한 ‘산 자’들은 ‘죽은 자’의 가족들을 죽이기 위해 나섰다. 집단 폭력으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시민을 가족을 한 곳으로 몰아넣고 발길질과 각목으로 사정을 두지 않고 구타했다. 이 모습에서 인간이 역겹다. 
 


한 때는 점심시간에 같이 족구를 하며 형님, 동생 했을 사이였을 그들이, 때로는 회식자리에서 술자리에서 동료애를 나누고, 길흉사에 서로의 가정을 방문해 애환와 즐거움을 함께 나눴을 사이였을 그들이 이제는 서로 살아남자고 주먹을 날리고 욕설을 퍼부었다. 간악한 인간의 모습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나타낸 셈이다.  

용역들은 또 무언가? 그들은 돈에 인성을 팔아넘긴 이들에 불과하다. 타인의 가정과 삶을 짓밟는 일을 해서라도 그들 자신과 가족의 윤택함을 선택한 이들이다. 자본주의라는 이 사회에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성이 아니라 오로지 금전적 이익뿐이었다. 그 추악한 욕망으로 죽은 자를 다시 죽이기 위해 그들은 나섰다. 인간의 잔혹함이다.
 

내가 쌍용차 사태에서 본 것은 합법, 불법, 논리와 비논리가 아니다. 단지 인간이 자신의 이익과 삶을 위해 얼마나 더 잔인해 질 수 있는지를 다시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숱한 의문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믿음, 그 자체에 대한 회의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당한 희생자들을 발굴하는 현장에 서면 항상 느끼는 궁금증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이토록 참혹한 짓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그 하나다. 또 하나는 그들의 무참히 죽일 수 있었던 부류의 사람들이 당대에도 존재할까 하는 의문이었다.
 



감수성을 풀어 던져 놓으면 당대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잘 정돈된 거리와 녹음이 내리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환경에서는 잊고 지낼 뿐이다. 그 곳에 서면 세상은 그저 아름답고 풍요하고 지적이며 이성적이다.

이것이 내가 살고 있는 주위의 일상적인 모습이며 이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간 중간 스며드는 의구심은 어쩔 수 없다. 내가 아름다움만을 포장하고 있는 세상의 껍데기만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역시나 그랬다. 쌍용차 사태에서 일부의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잔혹함은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 그 이하가 아니었다. 총만 쥐어졌다면 그러고도 남을 터다. 파시즘으로 무장한 그들이 힘의 우위를 앞세워 약자나 반대파들을 민간인 학살하듯 그렇게 살상을 자행했을 법도 하다. 

이렇게 내가 쌍용차 사태에서 본 것은 이해와 욕구에 따라 인간성을 저버리고, 야수가 될 있는 인간의 추악함과 잔혹함 뿐이다. 쌍용차 사태는 결국 인간성의 상실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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