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길을 걸었더니 하늘과 땅을 걷더라.

길이 있어 사람이 걸었더니, 그 길은 하늘에 닿았다가 지상으로 내려오더라.

 이 길은 경남 합천군 황매산 자락에 위치한 모산재에 있다.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 축제를 탐방을 위해 찾았던 길의 산행. 하늘에 닿았던 이 길은 다시 지상으로 이어져 인간세계와 살을 섞는다.

 그 길에 서면 무성한 수목은 온데간데 없고, 넓은 평원만이 하늘을 베개 삼아 대지에 누웠다. 갖가지 야생화와 수풀로 이부자리한 평원에는 사람도 풀꽃이 된다

정상 언저리 능성에 다다르면 시멘트와 아스팔트 냄새 짙은 내 모습은 이미 없다. 겹겹이 쌓인 산봉우리는 오래전의 과거. 그런 까닭에 황매산은 영화나 사극에서 배경이 된다. 시대극에서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은 대부분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한다.

 

합천군 황매산 능선에서 모산재로 향하는 길

석산인 모산재는 기암괴석과 풍광이 절묘하다.


황매산 정상을 뒤로 하고 영암사지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면, 전국 최대의 철쭉 군락지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면 길은 모산재로 이어진다. 황매산의 철쭉군락이 유명세를 얻었지만, 모산재를 잇는 이 길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드문, 두어 번의 등산객을 만날 뿐이다. 때문에 모산재는 산을 즐기는 산사람들만이 애용하는 길이 됐다.

 평원을 가득 메운 철쭉 군락지는 하늘에 닿아 있다. 아주 오래 된 시간, 지금은 불혹을 넘겨버린 한 사내가 청소년기에 어느 촌락의 한 봉우리에서 보았던 그 하늘이다. 산 능선에 누워 깊이를 알 수 없는 하늘과 수만 가지 형상의 구름에 머리가 텅 비어 버렸던 바로 그 하늘이다. 하늘과 맞닿은 이 곳에는 수 겹의 봉우리들이 두 손으로는 가릴 수 없는 위엄으로 버티고 섰다.

 모산재로 접어들면 잠시 호흡을 정리하는 길이 된다. 수림이 하늘을 얇게 가릴 즈음이면 어느새 하늘과 땅을 걷고 있다. 가파르게 이어진 초입의 길은 세상의 모든 애욕을 한꺼번에 토해내라는 듯 성큼 다가온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고 정화된 몸을 만들기에는 짧은 거리다. 그 짧은 시간에 스스로 몸을 정화시켜야 한다.

 

암반 사이로 버티고 선 소나무의 생명력이 경이롭다.

겹겹이 쌓인 산봉우리 위로 구름이 날고 있다.


이윽고 산봉우리에 서면 멀리로 땅이 보인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인간세계를 내려 보며 느꼈을 법한 감흥마저 든다.

 초입 길에서 마음을 비웠다면 사방으로 넓게 펼쳐진 자연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기암괴석이 내 안에 섰고, 산허리에 굵게 박힌 석벽에 내가 들어간다. 그 석벽과 기암괴석은 어느새 또 하늘에 닿아, 하늘인지 땅인지 헤아리기 어렵다. 영겁의 세월동안 바람에 안긴 거대한 바위는 그 표면이 제법 넓고 매끄럽다.

 암산인 모산재 길은 세속의 애욕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늘과 닿은 길이 끝날 즈음, 지상으로 향하는 길에는 순결을 요구하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 순결한 자만이 그 바위 안으로 손을 넣을 수 있다.

 무덤을 세우면 후대에 제왕이 나온다는 명당자리인 무지개 터에서 한 때나마 가졌던 세속의 욕망도 모두 털어내야 한다. 길은 그 허망한 꿈에 젖었다가는 필시 실족할 만한 가파름을 가지고 있다. 마음을 비우지 않고서는 두려움으로 설 수 밖에 없는 가파름이다.

 

모산재의 철 계단. 그 가파름은 아찔한 두려움을 안겨 준다.


가파름의 절정은 철 계단으로 이어진다. 철 계단은 인간의 땅으로 향하는 접경지. 온통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과 근심, 애욕과 이기심의 땅으로 향하는 접경지다. 그래서 현기증 나는 공포를 안겨준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순간마다 아찔함과 전율로 온 몸을 떨어야 한다.

 수 미터 거리의 낭떠러지를 두 눈으로 보아야 하는 철 계단은 인간의 땅에서 살아야 하는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다. 인간이 사는 땅에서의 삶처럼 이 곳 저 곳을 얇게 기웃거리며 재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길은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그 공포를 충분히 겪은 다음에야 밟을 수 있는 곳이 인간의 땅이다. 암반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땅은 그 시작부터 얕은 선택을 하지 말라는 듯이 조심스런 걸음을 요구한다.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사용한 태초의 원시인이 되어야 한다. 그 안에는 합천 해인사에서 입적한 성철스님의 길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에는 자신의 얼굴도 새겨야 한다.

 

모산재에서 바라 본 영암사지


이렇게 한걸음씩 걷다 보면 비로써 인간에게 허용된 땅에 서게 된다. 이 순간부터 걸음이 빨라진다. 다시 익숙한 인간의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길은 다시 인간의 욕심이 파괴한 자아를 되새겨준다바로 신선이 인간의 땅에 접경한 첫 발치에 세운 구도의 불사, 영암사지다.

 영암사지는 땅이 하늘로 향하는 길에 섰다. 오래전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온 신선이 하늘을 향해 걸음하던 인간에게 깨달음을 얻게 한 곳이다. 하지만, 스스로의 오만함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인간은 신선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끝내 이곳을 파괴해 버렸다.

 수도승이 떠나고 폐사지로만 남은 영암사는 그래도 위풍스런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불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축대에는 사자 한 마리가 웃는 표정을 하고 누웠다. 마치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조롱하는 모습이다.  그 앞으로는 어린 사자 두 마리가 하부의 각선미를 드러내며 석등을 바쳐 들고 섰다.

 

영암사의 축대 사자모양의 조각.

영암사지 석등. 하단부를 바치고 선 사자의 하체는 마치 어린아이의 엉덩이처럼 곡선미를 풍기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석등은 영암사지 삼층석탑 앞을 밝히며 외롭게 절터를 지켜왔다. 그 사이 어떤 이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다녀갔고, , 어떤 이는 재물을 탐해 석등을 훔치고자 다녀갔다. 하지만 석등은 오늘도 바람에 깎이고 비에 그을린 채로, 변함없이 하늘과 땅을 잇는 길에 우뚝 버티고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