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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간첩으로 몰린 북파공작원의 억울한 죽음

저는 개인적으로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되면서 오늘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북파되어 임무를 수행하다 귀환한 북파공작원이 오히려 이중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한 사실을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혔습니다. 특수임무수행자 단체에 계신 분들이 여전히 반공논리에 갖혀 있는 것은 안타깝기도 하지만, 한 개인의 억울한 사연이 밝혀진 것은 무척이나 다행한 일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결과를 보니  ‘특수임무수행자 심문규 이중간첩사건’은 북파됐던 특수임무수행자가 귀환한 뒤 자수했으나, 육군첩보부대(HID)는 이를 위장 자수한 것으로 판단하고 처형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간첩심문규 심문경위’에 들어 있는 위장자수의 근거들은 북파공작원 심문규를 위장자수로 몰기위해 조작되었다는 것이지요. 

자료사진 : 이경재의원실


북파공작원인 심문규는 1955년 9월 동해안을 통해 북파된 뒤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군에 체포되어 약 1년 7개월 동안 북한에 머물면서 대남간첩교육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1957년 10월 남한 육군첩보부대 기밀탐지 및 요인암살 등의 지령을 받고 다시 남하했지만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육군첩보부대에 자수를 했다는군요. 

그런데 육군첩보부대는 심문규를 563일 동안 불법구금한 상태에서 심문 또는 북에 대한 정보입수, 남파간첩 검거 등에 활용한 후 육군특무부대에 사건을 이관했다고 합니다.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육군특무부대 또한 심문규에 대한 재판권이 일반법원에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군사기밀 등의 이유를 들어 사건을 군검찰에 송치했고, 군검찰도 이를 묵인한 채 중앙고등군법회의에 기소해 결국 1961년 5월에 대구교도소에서 처형했다고 합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처형의 근거가 된 ‘간첩심문규 심문경위’는 ‘위장 자수한 것’을 드러낼 목적으로 사실과 다르게 만들어 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심문규가 남파 당시 간첩할 의사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심문규의 주관적인 의사를 확인할 방법이 없는 가운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도 역시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남북대립의 시기에 억울하게 희생된 것이죠.

진실화해위원회의 맨트를 빌리자면 당시 첩보부대 장교 등은 “첩보부대는 북파공작원이 공작활동 중 체포되어 간첩교육을 받고 내려온 경우, 즉시 자수하였더라도 특무부대 등 수사기관에 넘기지 않고 북한에 대한 정보 입수, 간첩검거, 간첩선 검거 등에 2년 정도 활용한 후 다시 북파를 시켰다”고 진술했다고 합니다. 이를 거절하는 경우 제거하거나 군사재판에 회부해 사형시키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심문규씨와 같은 북파공작원은 냉전의 시기에 남북대결 구도에 의해 인권은 커녕 국가의 보호조차도 받지 못한 채 도구로서만 활용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료사진 : 이경재의원실


자료사진 : 이경재의원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이 사건에 대해 국방부는 심문규의 사형이 집행된 사실 조차 가족에게 통보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재까지도 가족에게 시신을 인도하지 않고 있고 가족들도 2006년 4월에야 심문규씨가 사망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하나가 더 있군요. 육군첩보부대는 북파한 심문규가 귀대하지 않자, 부대에서 숙식하면서초등학교에 다니던 당시 8세인 아들에게 아버지를 만나게 해 준다며 제식훈련, 산악훈련을 비롯한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시켰다고 합니다. 

남북대결의 시대, 반공논리에 사로잡혀 인권이 무시당했던 현실을 다시 접하면서 안타까움이 입니다. 그 안에는 북파공작원들도 있고, 국민보도연맹 희생자들이 있으며, 부역혐의로 몰려 당시 남측과 북측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들이 있습니다. 역사가 반복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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