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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지리산 자락에서 전하는 58년 전 민간인 학살

경남 함양군 서상면 대남리 대로마을은 1945년 광복 당시에 80여 가구의 촌락이었다. 해방후 배달청년이라는 청년회가 조직되어 운동장을 만드는 등 마을 공동사업을 도맡아 하면서 주민들은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대로마을 서상출(가명.37년생)씨는 해방이후에 마을에는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는 없었다고 말했다. 좌익과 우익의 다툼의 영역에서 이 마을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 마을에도 1949년 10월 진압군에게 쫒긴 여순 국방경비대 14연대 경비병들이 지리산으로 들어오면서 쓰라린 비극이 시작된다.

진압군에 쫒긴 경비대 경비원들은 거창 북상면 월성리에 주둔했다. 인근 마을인 소로마을, 로상마을의 주민들은 빨치산이 된 이들에게 곡식을 가져다 줬다. 서상출 씨는 여순사건과 관련해서 마을의 피해는 웅장한 집이 불탄 것이 전부라고 했다.

이후 마을 운동장에 수도연대 등 빨치산 토벌대가 주둔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207부대 전투경찰’과 ‘서남지구 경찰’이 배치되면서 주민들은 빨갱이로 내몰렸다. 빨치산에게 곡식을 줬다는 이유다.

“낮에는 경찰에게 밥을 해서 가져다주고, 저녁에는 빨갱이에게 곡식을 줘야 했습니다. 살기위해서는....”

“밤에는 인민공화국, 낮에는 대한민국이었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마을 주민들은 살기위한 현실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역행위(?)가 끝나지 않자 경찰은 곡식을 제공한 경우 신고를 하라고 위협했다. 하지만 곡식을 빼앗기고 신고를 하러간 주민들도 빨갱이로 몰려 구타당하고 총살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 중에 젊은 사람들은 산으로 올라가 빨치산이 되기도 했다. 경찰의 가혹한 행위가 주민들을 빨치산으로 내몰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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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곧이어 마을에는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총살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서상출 씨는 “이장에게 도장을 맡겨 놓았는데 그 때문에 고생했다”며 고문과 학살의 현장을 전했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청년들은 지서로 끌려갔다. 당시 지서장은 김해수라는 사람이었는데 아주 잔인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지서장은 보도연맹 가입자들에게 세퍼트 개에게 물리게 하여 죽게 하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 또 마을운동회가 있는 날을 선택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외지인을 총살하기도 했다. 서상출 씨는 그 잔인함을 떠올리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혀를 내두른다.

인민군이 남하하면서 후퇴하는 군인과 경찰에 의해 보도연맹원들이 대량 학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1950년 7월경 칠형정부락 앞산에서 수십 명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시기가 인민군이 마을에 오기 바로 직전이라고 기억했다.

인민군이 마을로 들어왔다. 서상출 씨는 인민군이 와서 소와 자전거를 가져간 것 이외에 지역사람에게 인명의 피해는 주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전투하는 사람은 바지에 빨간줄이 아래로 걸쳐 있었고, 치안부대는 파란줄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저녁마다 각 마을 공터에 소집해서 사상교육을 했다. 또 학생동맹을 만들어 노래를 가르치고 사상교육을 했는데 “장백산 줄기줄기 피 어린자...”로 시작되는 노래를 그는 기억해 냈다.

마을에 인명의 피해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부터다. 빨치산 토벌작전이 벌어지면서 마을 주민들에게도 인명의 피해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서상출 씨의 가족은 이 시기에 참혹한 불행을 겪게 된다. 그의 고종형이 마을 청년대장을 한 것이 반동으로 몰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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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인민군이 후퇴하고 향토방위대, 청년방위대, 학도병이 조직됐다. 이어 빨치산 토벌이 시작했는데 그해 3월과 4월 15일에는 빨치산의 대반격이 이루어졌다.

“음력 3월 보름날 선친이 대퇴부에 총을 맞아 큰 부상을 입어 함양경찰서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달 14일 빨치산은 다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반동으로 몰린 할아버지가 총살을 당했다. 또, 마을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거동이 힘들었던 할머니가 불에 타서 숨지는 사건이 생겼다. 20여명의 사망자가 생긴 마을에서는 이날에 제사를 지낸다. 이 때문에 서상출 씨는 “빨갱이란 말만 들어도 용납이 안된다”고 했다.

1963년 부친이 세상을 떴다. 총상을 입었던 아버지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다리가 다 썩어가는 상태에서 고통스럽게 살다가 세상을 떴다. 진물이 나고 냄새가 고약했다며 그는 머리를 휘두른다. 1951년, 나이 16세에 그는 가장이 되었다.

그 이후 마을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휴전되고 11사단, 5사단이 내려오면서 참극은 다시 벌어졌다. 국군 11사단의 ‘공비토벌 작전’에 지리를 안내하러 갔던 김보곤, 서영길 이라는 두 사람이 죽으면서 부터다.

그들은 길을 안내하다가 빨치산의 매복에 걸려 포로가 된 후 총살당했다. 빨치산은 매복작전으로 11사단 9연대 소속의 한 중대를 이날 전멸시켰다.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마을로 들어온 국군은 11연대가 당한 책임을 주민들에게 돌리고 앙갚음했다. 주민들은 졸지에 빨갱이가 되었고, 무참하게 대량학살 당했다. 마을도 불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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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출 씨는 1958년 1월 군에 입대를 했다. 그가 배속된 부대는 아이러니하게도 11사단이었다. 군복무를 하면서 서씨는 하사관급 장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 중에는 대량학살에 참여한 사람도 있고 목격한 사람도 있었다. 하사관급 장교들은 “마을 주민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서상출 씨는 여전히 빨갱이라고 하면 치를 떤다. 아직도 빨치산에 대한 앙금이 안풀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전쟁에 대해서는 ‘하면 안된다’고 극구 반대를 한다.

“북한과 전쟁하는 상황은 절대 있어서 안됩니다. 평화를 유지하고 마지막으로 통일해야 합니다. 총칼은 양자가 망하는 겁니다. 될 수 있으면 화합해야 합니다. 전쟁만은 절대 해서는 안됩니다.”

소년기를 참혹한 전쟁으로 얼룩진 암울한 시기를 보낸 그는 전쟁이 무엇인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죽임을 당한 이들에게도 국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들은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억울하게 다 죽었습니다. 군인에게 경찰에게 빨갱이에게 당해 죽은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겁니다. 자기들 잘못이 아니라 시기를 잘못타고 난 겁니다. 국가가 위령비라도 세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