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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군

좌우익으로 나뉜 해방의 기쁨,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일제강점기, 박호철(가명, 34년생. 함양군 수동면)옹은 중학교 3학년 시절에 해방을 맞았다. 그가 살던 상백리 마을도 해방으로 들뜬 분위기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좌익과 우익의 이념분쟁에 휘말렸다.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마을 도로에 늘어선 버드나무는 삐라가 수없이 나붙어 하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삐라를 붙인 사람들은 지주들이거나 많이 배운 소위 지식인이라고 전했다. 삐라는 ‘농토는 농민에게 주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날이 밝은 후 경찰들은 마을로 찾아와 삐라를 떼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을 닦달했다고 한다. 해방을 맞이하던 1945년 그는 소작농으로 살고 있었다. 소작농을 하려면 지주에게 선물을 해야 했다. 명절이면 자신들도 먹어보지 못한 쇠고기를 사서 주어야만 소작을 할 수가 .. 더보기
지리산 자락에서 전하는 58년 전 민간인 학살 경남 함양군 서상면 대남리 대로마을은 1945년 광복 당시에 80여 가구의 촌락이었다. 해방후 배달청년이라는 청년회가 조직되어 운동장을 만드는 등 마을 공동사업을 도맡아 하면서 주민들은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대로마을 서상출(가명.37년생)씨는 해방이후에 마을에는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는 없었다고 말했다. 좌익과 우익의 다툼의 영역에서 이 마을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 마을에도 1949년 10월 진압군에게 쫒긴 여순 국방경비대 14연대 경비병들이 지리산으로 들어오면서 쓰라린 비극이 시작된다. 진압군에 쫒긴 경비대 경비원들은 거창 북상면 월성리에 주둔했다. 인근 마을인 소로마을, 로상마을의 주민들은 빨치산이 된 이들에게 곡식을 가져다 줬다. 서상출 씨는 여순사건과 관련해서 마을의 피해는 웅장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