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한국전쟁당시 부산·경남지역의 형무소 재소자와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에 대해 국가기관이 피해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부산·경남지역의 민간인학살에 대해 국가가 조사를 통해 실태를 공식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위원장 안병욱)은 2일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부산․마산․진주형무소 등에 수감된 재소자와 민간인이 육군본부 정보국 CIC(특무대), 헌병대, 지역경찰, 형무관(교도관)에 의해 불법적으로 희생됐다고 밝혔다. 진실화해위가 밝힌 희생자는 최소 3,400여 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576명이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부산․경남지역 형무소에서 희생된 대다수의 재소자들은 정당한 법적절차 없이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희생자들은 예비검속된 국민보도연맹원들과 함께 다른 형무소로 이감시
킨다는 이유로 끌려가 산골짜기나 바다에서 수천명이 집단학살 됐다.  

부산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26일부터 9월 25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부산지구 CIC(특무대)와 헌병대, 지역 경찰, 형무관들이 부산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을 비롯한 예비검속자 등 최소 1,500여 명을 집단 살해했다. 그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48명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형무소 희생자들은 다른 형무소로의 이감 등을 이유로 끌려간 후, 부산 사하구 동매산과 해운대구 장산골짜기 등지에서 집단 사살됐다. 그 중 일부는 부산 오륙도 인근 해상에서 수장된 것으로도 밝혀졌다. 
 

마산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5일부터 9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마산지구 CIC와 헌병대, 지역 경찰 마산형무소 형무관들에 의해 최소한 717명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총살되거나 마산 구산면 앞바다에 대부분 집단 수장되었다. 이들 중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358명이다. 
 

또, 진주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최소 1,200여 명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진주지구 CIC와 헌병대 그리고 진주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집단 살해되었으며,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70명이다. 진주형무소의 희생자들은 진주 명석면 우수리 갓골과 콩밭골, 관지리 화령골과 닭족골, 용산리 용산치, 문산읍 상문리 진성고개, 마산 진전면 여양리 산태골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1950년 9월 1일,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이 희생 현장으로 끌려가기 직전 트럭에 실려 있는 모습 [출처] Picture Post-5086-pub.1950 (by Bert Hardy)


진실화해위는 이번 사건에 대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비점령지역으로 치안이 유지된 부산과 경남지역에서 특별히 위험하다고 할 수 없는 형무소 재소자와 민간인 수천 명을 군경이 일방적이고 임의적으로 집단학살한 것”이라고 말하고 이는 “사상 유례가 없는 비인도적인 행위”라고 말했다.  

또, “비록 전시였다고는 하나, 대한민국이 통치하고 있던 비전투․비교전지역인 부산․경남지역에서 단순히 남하하는 인민군에 동조할 것을 우려하여 형무소 재소자들과 민간인이었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불법적으로 살해한 것은 범죄행위”라고 말했다. 
 

진실화해위는 “재소자 가운데 일부의 기결수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헌병대에 인계돼 총살되었으며 대부분 육군형사법․국방경비법 등을 위반한 징역 3년 이하의 단기수들로 당시 사형수가 아니었다”며 “형이 확정된 기결수를 다시 처형한 것은 헌법이 규정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위반한 것이고 군법회의는 요식적인 행위였을 뿐 사실상 집단학살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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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16일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을 비롯해 ‘순창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과 ‘불갑산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등 모두 5건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고 국가의 공식사과와 위령사업의 지원 및 군인과 경찰을 대상으로 한 평화인권교육 실시 등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가 5건의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해 조사한 결과는 참혹했다. 당시 군경과 치안대는 장티푸스를 앓으며 피난하지 못한 민간인을 움막에 넣어 불태워 죽이거나, 희생자들의 귀를 잘라가는 잔혹성을 띠기도 했다. 특히 희생된 민간인들은 적법한 재판도 없이 개인적 감정이나 자의적 판단으로 집단 총살을 당하기도 했다.
 

산청외공리 민간인학살 자료사진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처형”
 

진실화해위원회는 ‘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 사건’을 조사한 결과,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약 3개월간 당시 충남 서산(現 서산시, 태안군)지역에서 서산․태안경찰서 경찰, 치안대, 해군에 의해 다수의 민간인들이 부역혐의자로 몰려 희생됐다고 발표했다.
 

진실화해위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시 서산경찰서 태안경찰서와 치안대는 1950년 10월 중순부터 12월 사이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부역한 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을 각 읍.면 창고와 경찰서․지서 유치장에 구금한 후 이들 중 ‘처형’으로 분류된 자들을 서산시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 해미읍성 동문 밖 방공호, 소원면 신덕리 해안 등지에서 법적 절차 없이 즉결 처형했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서산경찰서는 서산읍 부역혐의자들과 서산군 각 면에서 이송된 부역혐의자들을 경찰서 유치장과 읍사무소 창고 등지에 구금해 조사한 후, 처형대상자 300여 명을 서산시 인지면 갈산리 교통호와 수석리 소탐산으로 끌고 가 집단 사살했다.
 

해미면에서는 해미지서 경찰과 치안대가 부역혐의자들을 양조장과 지서 유치장으로 연행해 취조와 고문을 가했으며, 이 가운데 104명을 해미읍성 동문 밖 방공호와 반양리 옻걸이로 끌고 가 집단 사살했다.
 

또 소원면에서는 면치안대로부터 부역혐의자로 추정되는 주민들의 명단을 제공받은 소원지서 경찰이 치안대와 함께 부역혐의자들을 각 마을에서 연행해 면 창고에 구금했으며, 이들 중 192명을 신덕리 해안과 시목리 장재 금광굴, 모항리 만리포에서 사살했다.
 

진실화해위는 이외에도 지곡면, 이북면, 고남면 등 서산지역 20개 읍․면에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처형대상자로 분류된 부역혐의자들이 집단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고, 1950년 10월 8일 해군은 근흥면 정죽리 안흥항에 상륙 중 교전이 발생하자 발포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인근 주민 수십 명을 연행해 조사한 뒤, 이들을 안흥항 인근 바위(現 수협창고)에서 사살했다고 밝혔다.
 

민간인 희생자들은 명확한 처리기준 없이 경찰과 치안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처형대상자로 분류된 것으로도 밝혀졌다. 
 

당시 서산경찰서 사찰계에서 근무한 경찰 역시 “부역혐의자를 처형하는 과정에서 감정적 요소가 많이 개입됐다”고 진술했으며, 팔봉지서 경찰도 “무고하게 처형된 민간인들이 많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서산지역에서 부역혐의로 희생된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려갔던 20~40대의 성인 남성들로 여성과 청소년도 일부 포함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희생자 중에는 이웃의 권유나 강요에 의해 인민군점령기에 특정한 직책을 맡거나 자신도 모르게 특정 단체에 이름이 올랐던 다수의 사람들도 포함돼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경찰과 치안대, 해군이 적법한 절차 없이 적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의심만으로 비무장 민간인을 살해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국민의 생명을 침해한 불법적인 사건”이라고 밝혔다.
 

서산.태안지역의 민간인 희생자는 추정자 888명을 포함해 총 1,865명으로 확인되고 있다. 진실화해위는, 진실규명을 신청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사건 이후 멸족된 사례 등을 고려하면 이는 최소한의 희생자 수라고 덧붙였다.
 

함양 민간인 희생사건,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로 만들고 총살”
 

진실화해위원회는 ‘함양 민간인 희생 사건’을 조사한 결과,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함양 지역 민간인 86명이 빨치산과 협조․내통하였다는 이유로 국군 제3연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의용전투특공대)에 의해 집단희생 되었다고 발표했다. 
 

1960년 함양『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서류철』

진실화해위원회는 1948년 말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 반란군들이 지리산 자락에서 빨치산 활동을 본격화하자, 당시 지리산지구에서 빨치산토벌작전을 수행하던 국군 제3연대 제3대대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는 1949년 5월부터 1950년 3월까지 함양군 일대와 지리산 등에서 빨치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산간마을을 소개(疏開)하기도 했다고도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함양경찰서는 국군과 함께 반란군을 토벌하며 빨치산과 내통하는 혐의나 식량 보급처로 이용되는 마을 주민을 연행했으며 함양경찰서장의 명령으로 민간인들로 구성된 특공대는 지서의 지휘에 따라 경찰과 국군을 보조하며 마을 동향을 파악하고 민간인들을 연행하기도 했다.
 

또 국군과 경찰, 특공대는 함양읍 등 7개 지역 주민들을 빨치산과 내통․협조하였다는 혐의로 군부대, 함양경찰서, 각 지서 등지로 연행하여 고문과 취조를 한 후 함양읍 이은리에 있는 당그래산과 안의면 공동묘지 등지에서 살해했다.
 

함양군 수동면에서는 1949년 9월 18일 도북리 주민 35명에 이어, 다음날 죽산리 주민 18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지서와 함양경찰서를 거쳐 함양읍에 주둔한 군인들의 취조를 당한 후 도북리 주민 32명은 9월 20일에, 죽산리 주민 17명은 다음 날 군인들에 의해 당그래산에서 집단 사살됐다.
 

안의면 주민들은 1949년 8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군경에 의해 연행돼 당그래산에서 사살됐으며 서하면, 백전면, 휴천면, 지곡면 주민들도 경찰에 의해 연행돼 사살되거나 행방불명됐다. 당시 안의면 특공대로 활동했던 아무개씨는 “잡아온 사람들을 경찰들이 몽둥이로 패서 빨갱이로 만들고 나서 총살시켰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희생자들은 무장한 빨치산들이 마을에 출현하여 식량 등을 요구하였을 때 강압적인 분위기와 협박에 못 이겨 협력할 수밖에 없는 보통의 주민들로 대부분 농사를 짓던 20~40대 남성들이었다”고 밝히고, 이 사건의 가해 주체는 국군 제5사단 제3연대, 함양경찰서 경찰, 특공대로 확인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은 군경이 빨치산 토벌작전이라는 명분 하에 비무장․무저항의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연행하여 아무런 법적 절차 없이 살해한 것은 반인도주의적이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한 것이라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이 밖에 △순창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불갑산지역 민간인희생사건 △담양․장성지역 경찰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등 3건에 대해서도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국가의 공식사과를 권고했다. 

 # 관련기사 : 좌우익으로 나뉜 행방의 기쁨,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 관련기사 : 지리산 자락에서 전하는 58년전 민간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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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ㅎㅎ 2009.01.19 07: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한민국 경찰놈들이 그렇죠 뭐... 어청수를 보세요 지금도 그렇잖아요? 촛불 하나 들었다고 민주시민을 불법폭도로 몰아부치고 깨부수고 유모차 애기들한테도 분말 소화기를 발사하는 놈입니다.

  2. Favicon of http://blog.daum.net/osaekri BlogIcon 한사의 문화마을 2009.01.19 08: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은 아닐까요?
    이미 부역자 타령을 하고 빨갱이 타령을 하는 조중동에 세뇌된 수구들이 득세를 하고 있는데요?
    그들이 애국자인양 설치는 이 세상이 과연 온전한 세상인가요?

  3. 노씨 2009.01.19 14: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무현 장인에 의해서 우리 양민 11명 죽었다카데...

    좌파 빨갱이 새끼들에 억울하게 죽은 우리 양민이 훨씬 많다

    빨갱이에게 억울하게 죽은 사람 나도 많이 보았다

  4. 뻘갱이 2009.01.19 14: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성이와 그의 똘마이 빨갱이 새끼들에게 우리 양민 참말로 많이 돌아가셨다

    빨갱이 새끼들에게 억울하게 죽은 그들의 한은 누가 달래 주노?

    이 같은 빨갱이 새끼들아... 나는 통곡한다 이 빨갱이 새끼들아

  5. 아오지 2009.01.19 14:2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강정구-이재정-노무현-김대중-박지원 --- 북한으로 가거라 꺼져 버려라

    가서 정일이와 아오지 탄광에나 가거라

  6. Favicon of http://blog.daum.net/gabinne/12376075 BlogIcon 林馬 2009.02.23 11: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참말로 쪼잔한 사람입니다.
    의회 시정질문에 열받아 보복인사를 한다는 것이 시장으로서
    할 일인가요.
    의회도 당신의 발밑창 만큼도 생각하지않다는 증거지요.

  7. Favicon of http://ssbk1094@daum.net BlogIcon 김성섭 2009.02.26 15: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민족의 비극적 전시 당시에 범죄 혐의에 대한 법적 판단이나 절차없이 목숨을 빼앗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고 재발되어서는 않된다. 그러나 60여년전의 사건에 대해 군인,경찰에 평화인권교육을 시키라니? [진실화해위]에서 다루는 사건들을 직,간접적으로 접할때 마다 이사람들은 화성에 사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전시 상황에서 발생한 모든 일을 미화하고 당연한 것으로 치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나 판단의 기준은 나타난 결과 못지 않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나 여건 등을 종합판단해서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행정부의 기능도 미약하게 작동하고 있던 당시에 면,리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사건까지 법적절차와 재판등 민주적 절차를 들먹인다는 것은 결국 내얼굴에 침뱃는 격이다. 또 군경이나 특공대,치안대 같은 소위 우파단체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등은 거침없이 국가의 사과와 배상을 권고하면서 공산군이나 리,당인민위원회에 의해 저질러진 양민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가? 참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다. 역사적 사실은 결국 후세의 사가들에 의해 공정하게 결론지어질 것으로 기대하지만 혹 거기에 앞서 이런 판결이나 섣부른 결론이 이들의 판단에 그릇된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일제강점기, 박호철(가명, 34년생. 함양군 수동면)옹은 중학교 3학년 시절에 해방을 맞았다. 그가 살던 상백리 마을도 해방으로 들뜬 분위기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좌익과 우익의 이념분쟁에 휘말렸다.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마을 도로에 늘어선 버드나무는 삐라가 수없이 나붙어 하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삐라를 붙인 사람들은 지주들이거나 많이 배운 소위 지식인이라고 전했다. 삐라는 ‘농토는 농민에게 주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날이 밝은 후 경찰들은 마을로 찾아와 삐라를 떼지 않았다고 마을 사람들을 닦달했다고 한다.
 

해방을 맞이하던 1945년 그는 소작농으로 살고 있었다. 소작농을 하려면 지주에게 선물을 해야 했다. 명절이면 자신들도 먹어보지 못한 쇠고기를 사서 주어야만 소작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소작농은 지주에게 논 한마지기 당 한 섬의 쌀을 지주에게 주어야만 했다. 당시에는 논 한마지기에서는 두 섬 가까운 쌀이 생산됐다. 소작농은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지대로 지주에게 주어야 했다.
 

그러다가 1948년 이승만 정권시절, 조봉암 농림부장관이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조봉암은 이후 진보당 당수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1958년 이승만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사형을 당한 인물이다. 토지개혁은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이 원 지주에게 5년 동안 땅값을 상환하는 유상몰수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정부는 그 증서를 농민에게 주었다 한다. 토지개혁이 실시되면서 곡황(곡식창고)에 쌀을 채워놓고 살던 지주들은 화병에 죽기도 했다. 상백리 마을의 지주 김아무개씨도 그렇게 죽었다.
 

함양군 상백마을

 
상백리 마을에는 이아무개라는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 한문공부를 많이 해서 마을에서는 천재라고 불리던 그는 친구들과 마을사람에게 좌익사상을 가르쳤다. “없는 사람들을 잘 살게 해준다”는 그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했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이 가난했고, 지주들에게 생계를 의지해야 할 만큼 살림살이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어느날 관에서 데리고 간 후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가 잠들었을 때 누군가가 와서 잡아 갔다. 그의 부모는 이 사실을 알고도 하소연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친구였던 박호철 옹은 “좌익에 포섭된 사람들은 이 아무개처럼 다 사라졌다”고 했다. 
 

1949년, 마을에는 우익단체인 한청(대한청년단)이 조직되었다. 각 부락별로 조직된 한청은 죽창을 들고 공비(여순사건으로 빨치산 활동을 하던 여순국방경비대)들이 마을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경비를 서고 있었다.

어느 날 공비가 마을로 내려와 정동석이란 사람의 집을 알려달라고 총으로 위협을 했다. 보초를 서던 이아무개는 협박에 못 이겨 정동석의 집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 이후로 그는 정동석에게 ‘죽을 만큼’ 맞았다. 박호철 옹은 “죽창으로 총을 당하지 못한 한청이 빨치산에게 마을의 지리를 가르쳐주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박호철 옹의 외가 사촌형은 빨치산에게 곡식을 운반해 주다가 도중에 탈출을 했다. 그 일로 인해 사촌형은 수동지서에 잡혀왔다. 당시 구장이라는 사람도 함께 잡혔다. 두 사람은 부역혐의로 안희면 하월리 하원에서 자신들의 무덤이 될 구덩이 앞에 서게 됐다. 이 사실을 안 박호철 옹의 모친은 소 한마리 값을 지서에 전해주고 사촌형을 구해냈다. 그러나 돈이 없었던 구장은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했다. 그 시절에는 돈이 있는 사람들은 경찰에게 쌀이나 돈을 주고 살아나올 수도 있었다. 겨우 목숨을 건진 사촌형은 경찰에게 당한 고문과 구타로 피를 토했고, 평생을 반신불구로 살았다. 
 

집단 학살지인 당그레산.

이후 마을 사람들은 국민보도연맹 가입으로 죽을 위험에 처했다. 일자무식인 어른들은 도장을 모두 구장에게 맡겨놓았는데, 구장은 마을사람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도장을 찍어 보도연맹에 가입시켰다. 보도연맹에 가입된 줄도 몰랐던 그의 선친을 비롯한 동네사람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보도연맹을 죽인다는 소문을 들었다. 하지만 피난할 만한 곳이 없어 도망을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다행히 주민들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낫다. “생각보다 빨리 인민군이 남하 하면서 주민들은 학살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17세, 인민군이 마을로 오기 전에 국군과 구장은 “빨갱이가 와서 모두 잡아 간다”며 마을 사람들에게 피신을 가라고 했다. 마을사람들은 쌀과 냄비를 챙겨서 4km 떨어진 산골 부락으로 피난을 갔다. 


어른을 따라 피난 갔던 박호철 옹은 가축을 돌보기 위해 집에 남은 부친에게 밥을 해주려고 마을(수동면)으로 내려갔다. 마을 서낭제에는 피난을 가지 못한 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 날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국군은 훈련 중이라고 했다. 저녁이 되면서 점차 총소리는 가까워졌다.
 
미군과 국군은 인민군이 북쪽인 서상면에서 안희면 방향으로 올 것으로 알고 대비를 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그 반대 방향에서 들어왔다. 전라도 지역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보이는 인민군에게 국군과 미군은 포위가 되었다. 
 

전투가 벌어지면서 마을에서는 민간인 사상자도 생겨났다. 저녁 무렵 부자였던 김아무개 뒷집에 폭탄이 떨어지면서 그의 친구의 모친과 김 아무개가 파편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부자였던 김 아무개의 ‘정지가시내’(식모)로 살고 있던 분순이도 그날 죽었다. 그는 담을 넘다가 마침 떨어진 폭탄에 죽었다. 
 

그는 총탄을 피해 아버지와 논 가운데 파논 호(참호)에 몸을 숨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빨간줄이 아래로 내려진 바지를 입은 군인이 나타났다. 빨간 줄이 있는 바지를 입은 군인은 인민군 전투부대였다. 호에서 나오라고 지시를 한 군인은 손을 펴보라고 했다. 손을 펴 보이자 군인은 “호 속에서 나오지 말고 꼼짝 말고 있어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마을을 점령한 인민군은 동네사람들을 소집했다. 그리고 “당신들이 살 수 있는 세상이 왔다”며 “피난 간 주민들을 데려오라”고 했다. 산속 마을로 피난 간 사람들은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마을에 주둔한 인민군들은 “주민들에게 쌀을 주며 밥을 해 달라”고 했다. 박호철 옹은 “보리밥만 먹던 주민들은 그때 쌀밥을 맛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인민군 속에는 17살 난 병사가 있었다. 그는 동갑내기인 인민군과 아랫방에서 같이 자고 친구처럼 들에서 놀기도 했다. 
 

인민군(정규군)은 마을을 점령하고 난 후 짐승이나 여성에게 ‘해꼬짓’을 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정치공작대가 마을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노래를 가르쳤다. 그는 노래의 일부인 “아아...혁명은 다가왔다” 정도만 기억했다. 이때쯤 인민군은 마을의 토지를 주민들에게 분배해 주었다. 하지만 서울수복이 되면서 주민들은 토지를 다시 내어 놓아야 했다. 
 

또, 인민군 면당에서는 동네마다 의용군 수를 할당했다. 상백리에는 서너명의 젊은 사람들이 의용군으로 차출되어 갔다. 하지만 의용군으로 간 마을 주민들은 도망을 와 다시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서울이 수복되면서 마을에는 또 다른 변화가 생겼다.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젊은 사람들은 특공대로 가고, 토벌대로 모두 갔다. 이때는 빨치산 이현상 부대가 인근의 용추골짜기에 주둔하고 있었다. 1956년, 함양군에 있던 빨치산이 사라졌다. 주민들은 그 이후 돌아와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함양군 수동면에 위치한 공동묘지. 민간인 15여명이 학살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박호철 옹은 알려지지 않은 학살 장소를 기억하고 있다. 그의 당시 자신의 나이 17. 18세로 기억하고 있으나 한국전쟁 전,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는 지서에서 빨치산의 공격을 대비해 담을 쌓는 부역을 하고 있다가 트럭 한 대에 실려 온 청년들을 보았다. 
 

“하얀 테이프로 눈을 가린 청년들은 수동면 지서 뒤편 연화산 방향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모두 총살을 당하고 구덩이에 묻혔다”. 그는 그 시기를 빨치산에서 자수한 사람들로 구성된 부대인 ‘사찰유격대’가 활동하고 있던 시기라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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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군 서상면 대남리 대로마을은 1945년 광복 당시에 80여 가구의 촌락이었다. 해방후 배달청년이라는 청년회가 조직되어 운동장을 만드는 등 마을 공동사업을 도맡아 하면서 주민들은 새로운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대로마을 서상출(가명.37년생)씨는 해방이후에 마을에는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는 없었다고 말했다. 좌익과 우익의 다툼의 영역에서 이 마을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 마을에도 1949년 10월 진압군에게 쫒긴 여순 국방경비대 14연대 경비병들이 지리산으로 들어오면서 쓰라린 비극이 시작된다.

진압군에 쫒긴 경비대 경비원들은 거창 북상면 월성리에 주둔했다. 인근 마을인 소로마을, 로상마을의 주민들은 빨치산이 된 이들에게 곡식을 가져다 줬다. 서상출 씨는 여순사건과 관련해서 마을의 피해는 웅장한 집이 불탄 것이 전부라고 했다.

이후 마을 운동장에 수도연대 등 빨치산 토벌대가 주둔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207부대 전투경찰’과 ‘서남지구 경찰’이 배치되면서 주민들은 빨갱이로 내몰렸다. 빨치산에게 곡식을 줬다는 이유다.

“낮에는 경찰에게 밥을 해서 가져다주고, 저녁에는 빨갱이에게 곡식을 줘야 했습니다. 살기위해서는....”

“밤에는 인민공화국, 낮에는 대한민국이었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마을 주민들은 살기위한 현실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부역행위(?)가 끝나지 않자 경찰은 곡식을 제공한 경우 신고를 하라고 위협했다. 하지만 곡식을 빼앗기고 신고를 하러간 주민들도 빨갱이로 몰려 구타당하고 총살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주민들 중에 젊은 사람들은 산으로 올라가 빨치산이 되기도 했다. 경찰의 가혹한 행위가 주민들을 빨치산으로 내몰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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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곧이어 마을에는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총살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서상출 씨는 “이장에게 도장을 맡겨 놓았는데 그 때문에 고생했다”며 고문과 학살의 현장을 전했다.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청년들은 지서로 끌려갔다. 당시 지서장은 김해수라는 사람이었는데 아주 잔인한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지서장은 보도연맹 가입자들에게 세퍼트 개에게 물리게 하여 죽게 하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다. 또 마을운동회가 있는 날을 선택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외지인을 총살하기도 했다. 서상출 씨는 그 잔인함을 떠올리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혀를 내두른다.

인민군이 남하하면서 후퇴하는 군인과 경찰에 의해 보도연맹원들이 대량 학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1950년 7월경 칠형정부락 앞산에서 수십 명이 집단 학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시기가 인민군이 마을에 오기 바로 직전이라고 기억했다.

인민군이 마을로 들어왔다. 서상출 씨는 인민군이 와서 소와 자전거를 가져간 것 이외에 지역사람에게 인명의 피해는 주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전투하는 사람은 바지에 빨간줄이 아래로 걸쳐 있었고, 치안부대는 파란줄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저녁마다 각 마을 공터에 소집해서 사상교육을 했다. 또 학생동맹을 만들어 노래를 가르치고 사상교육을 했는데 “장백산 줄기줄기 피 어린자...”로 시작되는 노래를 그는 기억해 냈다.

마을에 인명의 피해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부터다. 빨치산 토벌작전이 벌어지면서 마을 주민들에게도 인명의 피해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서상출 씨의 가족은 이 시기에 참혹한 불행을 겪게 된다. 그의 고종형이 마을 청년대장을 한 것이 반동으로 몰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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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인민군이 후퇴하고 향토방위대, 청년방위대, 학도병이 조직됐다. 이어 빨치산 토벌이 시작했는데 그해 3월과 4월 15일에는 빨치산의 대반격이 이루어졌다.

“음력 3월 보름날 선친이 대퇴부에 총을 맞아 큰 부상을 입어 함양경찰서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음달 14일 빨치산은 다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반동으로 몰린 할아버지가 총살을 당했다. 또, 마을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거동이 힘들었던 할머니가 불에 타서 숨지는 사건이 생겼다. 20여명의 사망자가 생긴 마을에서는 이날에 제사를 지낸다. 이 때문에 서상출 씨는 “빨갱이란 말만 들어도 용납이 안된다”고 했다.

1963년 부친이 세상을 떴다. 총상을 입었던 아버지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다리가 다 썩어가는 상태에서 고통스럽게 살다가 세상을 떴다. 진물이 나고 냄새가 고약했다며 그는 머리를 휘두른다. 1951년, 나이 16세에 그는 가장이 되었다.

그 이후 마을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휴전되고 11사단, 5사단이 내려오면서 참극은 다시 벌어졌다. 국군 11사단의 ‘공비토벌 작전’에 지리를 안내하러 갔던 김보곤, 서영길 이라는 두 사람이 죽으면서 부터다.

그들은 길을 안내하다가 빨치산의 매복에 걸려 포로가 된 후 총살당했다. 빨치산은 매복작전으로 11사단 9연대 소속의 한 중대를 이날 전멸시켰다.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됐다. 마을로 들어온 국군은 11연대가 당한 책임을 주민들에게 돌리고 앙갚음했다. 주민들은 졸지에 빨갱이가 되었고, 무참하게 대량학살 당했다. 마을도 불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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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출 씨는 1958년 1월 군에 입대를 했다. 그가 배속된 부대는 아이러니하게도 11사단이었다. 군복무를 하면서 서씨는 하사관급 장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 중에는 대량학살에 참여한 사람도 있고 목격한 사람도 있었다. 하사관급 장교들은 “마을 주민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서상출 씨는 여전히 빨갱이라고 하면 치를 떤다. 아직도 빨치산에 대한 앙금이 안풀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전쟁에 대해서는 ‘하면 안된다’고 극구 반대를 한다.

“북한과 전쟁하는 상황은 절대 있어서 안됩니다. 평화를 유지하고 마지막으로 통일해야 합니다. 총칼은 양자가 망하는 겁니다. 될 수 있으면 화합해야 합니다. 전쟁만은 절대 해서는 안됩니다.”

소년기를 참혹한 전쟁으로 얼룩진 암울한 시기를 보낸 그는 전쟁이 무엇인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죽임을 당한 이들에게도 국가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청년들은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억울하게 다 죽었습니다. 군인에게 경찰에게 빨갱이에게 당해 죽은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겁니다. 자기들 잘못이 아니라 시기를 잘못타고 난 겁니다. 국가가 위령비라도 세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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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gjjf 2008.12.18 09: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빨치산을 구분하기위해서는 섯불리 판단할수없다. 왜냐면 그들은 수시로 둔갑하기 때문이고 거짓말장이기 때문이죠

  2. 노무현 장인 2009.01.19 14: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무현 장인을 비롯한 좌파 뻘갱이들이 수 많은 우리 국민 패 죽인 사례를 논하자

    뻘갱이들에 의해 수 많은 우리 양민이 죄없이 죽었다

  3. 정일이 2009.01.19 14: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성이- 정일이 가나 새끼들

    빨지산 새끼들이 얼마나 많은 우리 양민을 학살 했는가?

    나는 보았다 그 간나 새끼들의 만행을... 종간나 새끼들 빨갱이 새끼들...

  4. 이나라 2009.01.19 14: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 나라 --- 빨갱이 나라인가? 빨갱이에 의해 죽은 양민 문제 먼저 논하자

  5. 보거스 2018.08.02 15: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당시 우리군,경에 학살당한사람들도 많습니다. 제 조부께서 서상면 대남리
    노상마을분이신데 희생당하셨습니다.
    지서에 잡혀가셨다가 휩쓸려 학살당하셨고, 학살자 명단자료도 있지만 어떤누구의 사과도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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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이하 진실화해위원회)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유해를 발굴하고 있는 ‘경남 산청군 외공리 유해발굴 현장설명회’가 25일 발굴 현장에서 열렸다.


유해발굴과 조사용역을 담당하고 있는 경남대학교 박물관(책임연구원 이상길, 경남대 교수)은 발굴조사 중간보고를 통해 200여구의 유해를 발굴하였고, 탄피와 고무신 등의 유품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지난 7월 18일부터 시작된 발굴조사는 매장지 확인과 내부 노출작업, 그리고 실측이 완료된 상태로 내일(16일)부터는 유해를 수습하고 정리할 예정이다. 하지만 통비분자로 몰려 학살을 당한 원리의 주민들의 경우에는 매장지 1개소만 확인된 상태로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규군에 의해 이루어진 학살과 매장


현장설명회를 진행한 경남대학교 이상길교수는 5개소에 이르는 매장지의 특징은 “유해의 배치가 정연한 상태로, 허리가 꺾여 반으로 접혀진 상태”를 들었다. 유골이 노출된 상태로 보아 당시에 두 손이 묶인 채 구덩이에 끓어 앉은 채로 총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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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탓에 유골들은 정연하게 배치가 이루어져 있지만, 혼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교수는 보도연맹과는 달리 학살지와 매장지가 동일해 나타난 현상으로 설명했다. 그는 “보도연맹의 경우 학살 후 매장작업을 주민들을 동원해서 한 경우는 가지런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혼재된 모습은 총격 후 쓰러진 원형이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2000년에 민간단체에 의해 먼저 발굴되었던 1호 매장지는 대퇴골 기준으로 보면 적어도 142명 이상이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1호 매장지에 “여자와 어린이가 다수 있었다.”는 증언에 대해 이 교수는 “현재로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러나 두개골이 특히 작은 경우도 있어 가능성은 있다.”고 덧붙였다. 
 

2호에서 4호에 이르는 매장지의 유해는 모두 손을 뒤로 묶인 상태에서 머리에 총격을 받았다는 것이 발굴 팀의 견해이다. 유해의 상태로 보아 구덩이에서 사살된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이고, 굻어 앉혀진 상태로 신체가 반으로 접힌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학살지에서는 천 일부, 고무줄, 신발끈, 그리고 성격을 알 수 없는 철편과 유리조각 등이 나왔다. 그리고 태극마크가 그려진 수상비행기가 양각되어 있고, 그 아래로 ‘코리아 해방(corea hea bang)’이라고 적힌 허리띠 버클과 인상(仁商), 경농(京農), 금중(金中)이라고 새겨진 단추도 나왔다.

이에 대해 이상길 교수는 “이것만으로 희생된 분들의 신원이나 출신지역 등을 알기에는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해방을 한국식 방식을 사용해 영어로 표기한 점, 그리고 태극마크로 보아 외국인이거나 인민군이 아닌 남한사람의 소지품인 것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이어 비녀가 나온 점으로 보아 여성이 있었다는 증언과 일치한다고 밝히고, 탄피가 한곳에서만 집중되어 있는 구덩이의 경우, 그 지점에서 가해자가 사살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족없는 유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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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외공리 소정골에서 학살된 유골들은 유족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때문에 그들이 어느 지역 출신이며, 무엇 때문에 학살되었는지가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발굴에서도 그들의 신원을 알 수 있는 단서와 가해부대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는 발견이 되지 않았다.

이상길교수는 “증언 가운데 ‘경북영’ ‘전북영’이라는 버스 넘버가 있었다는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서울 시영버스는 1967년 3월 11일 실시된 제도라며 사실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또, 인상(仁商), 경농(京農)만의 자료로 학생이라고 단정을 지을 수 없다고 덧붙이고 단지 서울, 경기 지역이라는 점에서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까닭에 산청 외공리 소정골의 민간인 학살은 피해자의 신분이 “죄수와 같은 수감자가 아닌 순수한 민간인이었다는 것과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상길 교수는 당시 10대가 넘는 버스를 타고 왔다는 증언과 학살시기가 1951년이라는 점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이 38선 이남을 수복한 뒤인 1950년 12월 1일 ‘부역행위 특별처리법’이 만들어졌고, 그 이전인 1950년 11월까지 약 55,000여명의 부역자들이 검거된 사실과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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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이루어진 학살


외공리 학살지의 경우 또 하나의 특징은 학살자체가 매우 은밀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타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의 경우처럼, 시신 수습에 동원된 주민들도 없고 살아난 사람도 없다.


이상길 교수는 “장소 물색이나 뒤처리 과정에서 현지 경찰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며 “당초 외공리를 지나 올라갔다가 차를 돌려 다시 내려왔다는 증언으로 볼 때, 현지 사정에 어두운 그들이 은밀한 장소를 물색하고자 하는 행보”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지리에 어두운 그들이)경찰을 포함한 현지인을 전혀 이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학살사건을 외부로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의지를 볼 수 있고, 죄수를 처형하듯 한 사람씩 머리에 총을 쏘아 절명시킴으로서 아무도 살아 돌아간 사람이 없었다는 점도 다른 학살사건과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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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offree.net/ BlogIcon 도아 2008.08.26 10:1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런 사실을 보면 인간만큼 잔인한 종족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자신의 동족을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종족이 인간이라죠.

  2. Favicon of https://vibary.tistory.com BlogIcon 비바리 2008.08.31 13: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헉~~
    가슴도려낸, 살육현장이네요.
    제주 4.3사건도 제주도를 온통 피바다로 물들였지요.
    민간인과 여성 학살이라는 점도 경악케 하는군요

  3. Favicon of http://blog. daum.net/mi2591 BlogIcon 세상만사 2009.01.13 15: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세기 동안 억울한 개죽음의 늪에서 벗어날 기회가 잠시 왔었지만 , 또다시 암울한 기대할수없는 나락으로 떠밀리게 됐으니....불행한 우리의 역사가 , 한낮 , 이익집단에 의해 찢기고 ,발기는 모습이 안타깝고 슬퍼 집니다 . 용기를 가지시고 계속 정진 하십시오 . 내 블로그에 사진 몇장 올립니다 . 허용 바랍니다 .

  4. 포이에마 2009.01.24 13:1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부터 충북대학교 대학원 체질인류학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지난해 말부터 유해감식센터에서 유해정리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 곳 산청 외공리에서 발굴된 유해들도 작업을 했습니다.
    물론 전공 자체가 사람의 뼈대를 공부하는 것이긴 하지만
    작업을 하면서 학살당한 유해를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프더군요..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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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차 발굴된 외공리 피해자들의 봉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에 대한 실태파악과 진상규명을 위해 유골발굴을 진행하고 있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2008년 유해 발굴지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유해발굴 계획이 확정된 곳은 △산청군 원리 및 외공리 △전남 순천시 매곡동 △ 충북 청원 분터골 및 지경골 △ 경북 경산코발트 광산 △전남 진도군 갈매기 섬이다.


진실화해위는 이들 유해 발굴지 중, 19일 경남 산청군 원리와 외공리 민간인학살사건에 대해 먼저 발굴사업을 시작했다. 경남지역에서는 2000년 산청 외공리와 2004년 마산시 진전면 여양리 보도연맹관련 피해자들의 유해들이 민간차원에서 발굴되기는 했지만, 국가주도로 민간인 학살자들의 유해가 발굴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산청군 외공리와 원리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일단 국민보도연맹 피해자는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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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공리 민간인학살 매장지를 둘러보는 관계자들


원리 민간인 피해자들의 경우 1949년 7월18일 덕산초등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3연대 37명이 빨치산 출몰과 관련해 작전 중 전원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를 계기로 1950년 2월경에 3연대 소속 국군이 시천, 삼장일대 지역 주민을 공비색출 명분으로 집결시켜 적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유족들의 증언에 의하면 야간에 빨치산이 음식을 구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오고, 낮에는 국군이 마을로 와서 음식을 주었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들을 통비분자로 몰아 죽창과 칼로 처형을 했다고 한다.


이와 달리 외공리 매장지는 1951년 2월과 3월 사이에 장갑차를 앞세운 트럭 3대에 분승한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11대의 버스에 태우고 와서,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소정골에서 총살을 한 후 5곳의 구덩이에 매장한 사건이다.


이런 탓에 외공리 피해자들의 경우는 유족이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대해 서봉석 전 산청군 의원은 “2000년 민간단체에서 1차 발굴을 진행한 결과를 보면  유품 중에 나타난 경농 등의 글자가 새겨진 단추와 금니, 실탄을 발견했다”고 말하고 이를 토대로 보면 피해자들은 부유층이며, 1.4 후퇴 당시 이송된 수도권지역 출신 민간인일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을 했다.


또, 유골을 파악한 결과 어린이와 여성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 가족단위로 끌려와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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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유해발굴 개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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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토제에서 제를 올리고 있는 유족들


이에 앞서 산청군 시천면 덕산중고등학교에서 열린 개토제에는 유족 100여명과 김동춘 교수(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와 이종흡 경남대학교 박물관장, 외공리 대책위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학살 전국유족회 또, 이재근 산청군수, 김민환 군의회의장 등이 참석했다.


김동춘 상임위원은 인사말을 통해 “왜 누가 그 사람들을 집단 살해했을까. 무엇이 두려워서 은밀하게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왜 어린이와 부녀자까지 죽였어야 했을까 하는 그 진실을 파 헤지기 위해 첫 삽을 뜬다.”고 말하고, 이를 통해 “유족들의 한을 풀고 진실규명과 위령 화해사업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유해발굴의 목적을 설명했다.


또, 김종현 전국 유족회 상임대표는 추도사를 통해 “반세기가 더 지난 길고 긴 세월이었다.”며 “이제야 겨우 발굴이 이루어지니 만시지탄을 느낀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민간인이 조류독감에 걸린 닭처럼 무참하게 도륙을 당할 지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고 묻고 “산자는 죽은 자의 모습만큼 처참하고 불안하게 살아왔다.”며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해 유족들이 제사라도 지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소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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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념을 올리는 유족들


이번 유해발굴을 담당하고 있는 이상길 교수(경남대 사학과)는 억울한 희생이란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이데올로기 문제를 떠나 유해를 발굴하고, 그 발굴과정을 통해 진실을 확보하고 피해자들의 영혼을 달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그는 문화제 발굴기법을 사용해 2개월 정도의 발굴을 예정하고 있다며, 외공리부터 발굴조사에 들어 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번 발굴을 통해 유골이나 유해를 통해서 피학살자들의 신원과 가해자, 그리고 피해자들 중 어린이와 여성들이 있는지 등, 목격자들의 증언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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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코발트 광산 민간인학살, 57년 만에 진실규명
진실화해위, “민간인학살 유해발굴...결정적인 물직적 증거”

  • 1950년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촬영 편집/구자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당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8일 오후 유해발굴을 위한 개토제와 위령제가 열렸다.

이번 유골발굴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집단희생과 관련하여 추진되고 있는 '2007년 유해발굴사업'에 따라 유해 발굴을 결정한 4곳 가운데 전남, 대전에 이어 세번째다.

무엇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주최하는 것인 만큼 국가 차원에서 실태파악과 함께 유해발굴을 통한 진상규명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무려 57년만에 유족들의 간절한 소원이 일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날 경북 경산시 평거동 산42-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폐 코발트 제1수평굴 앞에서 진실화해위원회 관계자들과 유족 등 300여명이 참석해 억울한 죽임을 당한 영령들의 영혼을 달랬다.


이 자리에서 송기인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은 “희생자의 대부분은 아무 죄 없는 민간인이며, 그 규모도 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며 그럼에도 “사건의 피해자와 유족들은 지난 60여 년간 온갖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받아왔고 한때 빨갱이로 몰리거나 연좌제라는 올가미 속에서 사회적 차별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송 위원장은 “이번 유해발굴은 억울한 죽임을 당한 분들이 무슨 일로 끌려가 왜 죽었는지, 어디에 묻혀 있는지를 밝혀내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라며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구제와 명예회복을 통해 따듯한 이웃으로 포옹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마련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사단법인 한국전쟁전후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이태준 이사장은 추도사를 통해 “지난 57년은 우리 유족에게 감옥이었다”며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희생은 반인도적이고 반인권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반역사적 행위”라고 지적했다.

이태준 이사장은 “정부와 정치인들도 정치투쟁을 그만하고 구천에서 떠도는 원혼들을 위해 양심적 측면에서 완전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져 영령으로 모실 수 있도록 동참해야 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위령제에 이어 진실화해위원회와 전국 유족회장단, 지역시민단체 관계자들은 개토제와 유해발굴을 위한 첫 삽을 뜨고 시신이 매장되어 있는 제1 수평갱도를 둘러보았다.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사건은 1950년 6월 말에서 9월 초까지 대구, 경북지역 국민보도연맹원과 대구형무소 재소자 등 3.500여명이 폐 코발트 광산 지하갱도와 인근 대원골에서 국군에 의해 집단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다.

당시 대구형무소 재소자 2,500여명과 경산 400여명, 청도 400여명, 영천 등 200여명의 국민보도연맹원 등이 집단 희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해 2006년 4월 25일 조사개시를 결정하고 10월 10일 실질조사를 거쳐 2007년 3월 20일자로 2007년 유해발굴 대상지로 최종 선정했다.

이번 발굴은 충북대학교 산학협력단 , 경남대학교 산학협력단, (사)한국전쟁전후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가 주관하고 있고, 2004년 마산시 진동면 여양리 민간인학살 사건 희생자 유골을 발굴을 진행했던 이상길 경남대 교수가 발굴팀을 이끌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어 오는 10일 충북 청원 분터골 보도연맹사건에 대해서도 발굴을 시작할 계획이다.

ⓒ민중의소리
Posted by 구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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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무현 2009.01.19 14: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노무현 장인과 빨갱이 새끼들이 우리 국민 더 아주 많이 죽였다카데

    그 문제 진상은 언제 밝히냐?

    빨갱이에게 죽은 우리 양민 진상이나 먼저 밝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