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면 출세하라 ”
기억으로 한창 경제개발이 이루어지던 인간성을 파탄시키고 금욕만을 추구하던 70년대 경제개발 시기에 유행했던 말이다. 풀어보면 ‘돈이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하기 싫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돈을 벌어라’고 가르치는 말이다. 이 말은 유행가 가사로도 나왔으니 당시 사회적인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2009년을 며칠 남긴 29일, 청와대가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 대한 연말 특별사면을 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일부경제인을 포함한 사면이 아니라 이 전 회장만 특별사면 하기로 했단다.
경제단체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만 특별사면하기로 한 것을 보면 찔리는 데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질이 감춰지는 것은 아니다.
특별사면 이유는 이렇다.
연합뉴스의 보도 내용을 빌리자면 <정부 관계자는 이 전 회장 사면과 관련, "경제 살리기,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등을 위해 이 전 회장의 사면이 필요하다는 경제계, 체육계, 강원도 등 각계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라며 "이 전 회장 이외 다른 경제인들에 대해서도 사면을 검토했으나 여러가지 면에서 부담되는 것으로 판단돼 이같이 결정했다"고 전했다.>
이 전 회장은 지난 8월께 배임과 조세포탈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확정됐다. 그는 자녀에게 경영권 불법승계를 배임해 유죄판결을 받았고 조세포탈로 인해 1,100억원의 벌금을 받은 중범죄자다. (프레시안)
그런데, 유죄판결이 확정된 지 고작 4개월도 지나지 않는 시점에 사면을 한단다. 이제야 알 것 같다. 한창 개발붐이 일던 때 억울하면 왜 출세를 하라고 했던지. 그러고 보면 대중들은 어떤 방면에서는 사회를 먼저 읽어내는 지혜를 가지기도 했다.
똑똑한 삼성은 그렇게 출세했다. 출세하니 어느새 또 하나의 가족도 생겼다. 주변에는 금력 앞에서 침을 흘리며 맹종하는 법조계, 언론계, 정치계를 통한 똑똑한 인사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여기에 더해서 경제발전, 국가에 대한 기여도를 앞세우며 소위 대마불사를 외치는 단체들도 있다. 이 정도면 삼성공화국이란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몇몇 상업지들은 외친다. “작은 잘못은 덮고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한다”. (프레시안) 이제 우리나라도 세금 포탈도 ‘작은 범죄’가 된 모양이다. 단 아주 많은 돈을 가진 이에게만 해당된다. 없는 놈이 까불다간 단칼에 아작이 난다.
이렇듯 졸개들이 먼저 나서서 일을 만들어주니 큰 것을 한탕해도 될 것 같다. 말이 큰 것이지 제대로 큰 것을 한탕해야 한다. 어리버리하게 한탕 하다간 오히려 몰매 맞는다. 작은 것을 한 탕하는 것은 바로 큰 죄가 된다. 이렇게 했다간 졸개들에게 먼저 맞아 죽는다.
보도에 따르면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은 "있던 죄를 없던 것으로 할 수 없는 만큼 몸으로든, 돈으로든 대체하는 방안이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다.
청와대 역시 이 전 회장 사면을 결정하면서 “대통령의 '국익' 외교 행보와 맞아떨어지는 것"이라며 "동계올림픽이라는 국익을 위한 결정"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들 논리를 보면 해방정국 당시 미군정이 반민특위에 구속당한 친일파들을 원직복직 시키면서 한 논리와 흡사하다. 당시 미군정은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며 친일파들을 복직시켰다. 물론 당시 대부분의 민족주의자들이 가졌던 정서인 사회주의를 막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이 때문에 가정을 포기하고 목숨을 내걸며 항일독립전선에 나섰던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빼앗겼다.
두 사례를 보면 무언가가 닮았다. 미군정이 사회적·정치적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과 현 정부의 국익을 위해 필요하다는 명분의 공통점은 중대한 범죄자에게는 사면이 된다는 것이다. 오해는 마시라. 삼성이 친일파라는 소리는 아니다.
국가적 이익을 앞세운 이상 법치와 국민적 정서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국가적 이익이라면 우매한 소시민은 그저 믿을 것이다. 경제를 앞세우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이익이 있다면 법치는 필요가 없다. 법이 필요한 곳은 오직 통치의 대상인 소시민들의 작은 범죄이다.
그래서 오늘도 대한민국은 물질만능주의, 학벌지상주의로 흐른다. 그곳엔 인간의 감정이 없다. 삼성 이건희 전 회장의 사면결정을 보면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헤게모니를 떠올려야 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비극이다.
'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건희 사면 두둔하는 어이없는 법무부 (4) | 2009.12.29 |
---|---|
성산아트홀 공연장에서 불편했던 이유 (8) | 2009.12.17 |
간첩으로 몰린 북파공작원의 억울한 죽음 (12) | 2009.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