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이야기

좋은 글은 사랑의 꽃씨를 담아...

‘사랑밭 새벽편지’라는 메일이 언제부터인가 매일 빠짐없이 오고 있다. 이 편지가 어떤 경로로 내게 오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기억을 하지 못한다. 어느 날 보도자료를 읽다가 스팸 메일통에 있는 것을 보고 내용이 좋아서 스팸을 해지했다. 그 이후로 심란한 날에 가끔 읽으며 마음을 정리하곤 한다. 

오늘도 새벽편지를 우연히 읽게 된다. 새벽편지는 차분하게 삶을 생각하게 하는 마력을 가진 글이 많다.
 

지난 5월에 만개했던 꽃망울들


27일자로 발송된 새벽편지는 ‘유곤의 기적’이라는 글이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교훈적이다. 중간 중간에는 가르침을 주는 글귀도 있다. 

“스승님, 분명 소변보는 자보다 대변보는 자가 더 심한데 왜 소변보는 자만 나무라십니까?”
 

이 한마디에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되씹는다. 큰 도둑은 잡지 않고 작은 도둑만 처벌하는 사회, 다수의 이익을 위해 힘없는 소수만을 희생시키는 사회. 권력의 불법은 합리화되는 반면, 약자의 불법만 부각되는 법치의 모순. 여기에 무관심한 소시민들. 세상을 향해 정곡을 찌른다.
 

11월29일자 편지는 ‘마음을 딲는 비누’라는 구한말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한 월남 이상재선생의 일화를 다룬 편지다.
 

조선 말 세도가 민씨집에 비누가 처음 들어왔을 때 많은 대감들은 비누로 세면을 해보기도 하고 손을 씯고는 신기하다며 민씨에게 아첨을 뜬다. 그러나 이상재 선생은 비누를 어기적 씹으며 먹고 있다. 이에 놀란 대감들은 비누를 먹는 사람이 어딨냐고 지적한다.
 

“여러분은 비누를 가지고 얼굴에 있는 때를 벗기지만, 나는 뱃속에 낀 때를 벗기려고 먹고 있소이다.”
 

문무대왕릉의 일출


참 통쾌하다. 예나 지금이나 내면을 가꾸기보다 외형을 포장하고 미화해서 입신의 발판으로 삼은 사람들이 한 둘인가. 속은 비어도 과대포장이 되어야만 팔리는 시대. 자신을 감추고 두터운 가면을 써 위장해야만 인정을 받는 시대는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이렇듯 새벽편지는 삶과 사회를 돌아보게도 하며, 때로는 독자를 부끄럽게 만든다.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사랑밭 새벽편지’는 종교, 이념, 나이, 빈부귀천을 초월한 휴머니즘 편지라고 소개되어 있다. 매일 발송된 편지함에는 각각의 사연들과 생각을 주는 글로 가득하다. 어떤 설교 못지않게 감동적이고 어떤 강의 못지않게 지적인 내용들이다. 

‘사랑밭 편지’는 소개란에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특히 가슴 아픈 사람들…. 애태우다가 뻥 뚫린 마음을 가눌 길 없어할 그 때, 아련한 음악과 글로 작은 힘이 되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 새벽편지가 이슬이 되어 당신의 창문에 노크하고자 합니다.”라고 적었다.
 

“좋은 글은 당신의 마음에 사랑의 꽃씨하나 살짝 떨어뜨립니다.” 라는 문구가 가슴에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