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은 전국공무원노조 경남본부가 김태호 경남도지사의 낙하산 인사에 대해 문제를 삼으며 투쟁하는 시기였다. 2004년 보궐선거로 당선된 김태호 도지사는 이후 시군을 포함한 인사를 단행했다.
공무원노조 경남본부는 도지사의 인사에 대해 ‘전방위적 낙하산 인사’로 규정하고 문제를 지적하는 한편, 재발방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공무원노조 경남본부 부본부장이었던 임종만 씨와 진주지부장이었던 강수동 씨는 파면을 당했고, 배병철 거제지부장은 해임을 당했다.
이들에게 내려진 혐의는 공무원노조 간부를 맡으며 ‘집단행위 금지와 복종의 의무’ 등이 명시된 지방공무원법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2007년 1월 경상남도 인사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집단행위로 문제 삼았고, 임종만(전 전국공무원노조 경남본부 부본부장) 씨는 “도지사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라고 반발했다. 징계도 인사의 범주에 속한다. 그는 마산시 소속인 자신을 경남도가 징계한 것은 도지사의 월권행위라고 주장했다.
임종만 씨는 낙하산 인사 거부투쟁과 관련해 징계를 받은 9명 가운데, 공직배제라는 중징계를 받은 8명 중의 한명이 되었고, 같은 해 3월 소명청구서와 행정소송을 시작했다.
그런 그가 2008년 12월 5일 같이 징계를 당했던 2명과 함께 복직결정을 받았다. 지난 2년간 줄기차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법원의 판결을 요구해 온 결과 고등법원에서 승소를 하게 되고 마산시장이 상고를 포기함으로서 원직복직이 결정된 것이다.
파면후 복직판결을 받은 임종만씨
공무원노조원으로서의 출발 파면후 복직판결을 받은 임종만씨 파면후 복직판결을 받은 임종만씨
임종만 씨는 1986년 6월, 거제 시청에서 공무원생활을 시작했다. 소위 ‘쫄병’이었던 초창기 그는 당시 공무원사회에서 만연해 있던 부정과 비리에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거제를 거쳐 마산으로 왔는데 과장들, 산림공무원들이 정신상태가 지금 현재의 공무원과는 비교가 안되었습니다. 출장을 나가면 직원이나, 민원인이 밥을 사야하고 허가가 나가면 반드시 대가가 돌아오던 시절의 공무원이었습니다.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민원인들의 등을 쳐 먹었죠.”
당시 공직사회는 그랬다. ‘쫄병’인 그에게도 술자리에서 이권청탁이 들어오고 하던 시절이었다.
“허가서류 결재를 올리면 과장이 이유도 없이 결재를 안 해주는 겁니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뭘 받았을 텐데 자기에게 안 올라온다고 생각한 겁니다. 업자에게도 전화가 안 오고, 나도 (돈을)안 주니까 결재가 안 되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돈을 줄 수도 없었던 20대 후반의 그는 결국 상사와 결재문제로 심한 욕을 하면서 싸우는 일이 생겼다. 그렇게 팽배해 있는 공직사회에 대해 회의를 느낄 즈음 마침 직장협의회(2000년)가 생겼다. 그는 제 발로 마산시 공무원직장협의회 들어간 후, 2001년 공무원노조 마산지부가 설립되면서 초대 사무처장을 맡았다. 그것이 공무원노조원으로서의 출발이었다.
부정, 부패에 맞선 아름다웠던 공무원노조
“사무처장을 하니까 눈에 조직의 구린 일이 보입디다. 그 당시는 겁이 없었죠. 그래서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기자실이었습니다.”
2001년만 하더라도 관공서의 기자실은 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그는 “기자들이 업자보다 더 했다”고 말했다. 공무원의 돈 뺏어가는 곳이 기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공무원노조의 ‘부정과 부패를 없애자’는 가치에 충실하려고 했다. 그리고 ‘기자실에 대못을 박는’ 모험을 강행하면서 기자실을 폐쇄하고 브리핑룸으로 전환했다. 여기에는 시민단체의 지지가 이어졌다.
이에 대해 공무원노조 마산지부는 청사내부와 시내에 현수막을 내걸면서 정화운동을 시작했다. 익명제보도 받아들였다. 관행이 거부되자 업자들은 상당히 곤란해 했다.
마산지부의 ‘명절 추석 떡값 안 받기 운동’은 언론의 지지와 시민들의 찬사를 받았고, 이 운동은 경남본부 차원으로 옮겨져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하지만 부패의 관행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부패방지위원회를 만든 경남본부는 전 시.군과 함께 교차단속에 들어갔고, 돈 봉투를 전달하는 현장을 적발해 언론에 공개를 하는 등 부패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왔고, 공무원노조가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시장군수의 업무비 공개 요구도 공직사회 내부로부터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렇게 시민단체로부터 지지를 받으며 성장한 공무원노조의 노동운동은 결국 단체교섭까지 이끌어 냈고, 인사문제에 까지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2002년 12월 4일 전국공무원노조 연가 파업때 마산에서 800명이 올라갔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다 놀랬죠. 전국에서 5천, 6천여명이 모였는데 800명이 올라갔습니다. 전국에서 난리가 낫던 거죠.”
당시 공무원들이 누구도 거론하지 못하던 일을 노조가 해내자 조합원들의 지지도 역시 높아가던 시절이었다.
신바람 나게 일을 해보고 싶다
“2008. 12. 05일 부산고법판결(사건번호 2008누 3401)에 따라 2007. 01. 29일자 해임처분을 동일자로 취소함. 행정관리국 행정과 근무를 명함.”
그는 1월 2일부터 마산시청에 출근을 했다. ‘복직했는데 뭘 먼저 하고 싶나’는 질문에 “열심히 신바람 나게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열심히 하고 싶은 일’은 해직이 되고서도 끝내 포기하지 못했던 숲을 가꾸는 일이다.
그가 해직되기 전 마산시는 경매를 통해 시민의 공원을 되찾은 사업을 추진했었다. 일반 기업체에서 경매로 나온 땅을 매입했다면 아마도 수익개발 사업으로 시민들의 녹지공간은 사라졌을 것이다. 마산시민에게 녹지공간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그는 시가 경매를 통해 땅을 사들이고 공원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공직사회에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시의 경매참여를 위해 시장과 국장을 만나고 의회로 달려가 설득한 끝에 시민의 녹지공간인 ‘자산숲’이 만들어졌다.
그런 만큼 해직을 당한 이후에도 그는 숲을 가꾸는 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열정적으로 일을 했는데 갑자기 손을 놓으니까 금단현상 같은 것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농장일을 통해 주변의 숲을 가꾸었습니다. 그것으로 심적인 갈등을 줄여보고자 했죠. 또, 농장 주위를 지나가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어서요.”
그는 지금까지 일해 왔듯이, 원직복직이 되면 다시 신명나게 일을 해 볼 생각이라고 밝게 웃었다.
공무원노조에 대한 연민...“하나 될 때 정부견제 가능”
그는 복직이 되었지만, 공무원노조 투쟁과정에서 파면과 해임을 당한 후 아직까지 복직을 하지 못하고 있는 동지들도 있다. 다행히 현직에 있는 조합원들의 특별기금으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특별기금으로 생활하는 것 역시 이들에게는 정신적 고통이다.
그도 그렇게 생활을 했던 만큼 이들이 빨리 원상회복되어 열심히 일했던 자리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도 간절하다.
그는 이들이 직장으로 돌아가는 길은 “공무원 노조가 하나 되는 길 뿐이다”고 말한다. 그 안으로는 현재 노노갈등으로 비추어지고 있는 공무원노조에 대한 안타까움이 서려있다. 그래서 공무원노조의 통합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것에 대해서 사뭇 기대와 희망이 서려 있다.
“양분된 공무원노조로서는 어렵습니다. (공무원노조가)한 목소리를 낼 때 입법 발효된 공무원노조 법하에서 한 목소리를 내던, 아니면 법외노조의 시절처럼 정부를 압박하는 큰 행동을 하던지 간에 공무원노조가 하나가 되지 않으면 복귀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또, 내부적으로 오해와 분란을 일으킬 수 있다며 말을 아끼면서도 공무원노조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이 부분에서 다소 비분강개한 표정도 엿보인다.
“MB정부를 가장 효율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곳은 민주당이나 민노당이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는 이들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하나 된 공무원노조만이 이 정부를 가장 효율적으로 견제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노조가 강하면 정권도 국민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이미 공무원노조가 그것을 실현해 낸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해직이후 줄곧 운영해 왔던 자신의 블로그에 대한민국 공무원으로서의 사명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공무원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공직사회개혁은 국가의 왼손인 하위직공무원들의 양심고백과 내부의 잘못된 관행을 고치는데에서 출발하며, 국가의 오른손인 국가권력에 아부하고 굴종하며 부당지시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견제하며 진정 국민의 봉사자로서 국민의 애환과 고통을 들어주고 국민에 행복을 선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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